분노의 감정이 경험의 한계에서 발생했을 때, 어떻게 그 분노를 다룰 것인가? 왜 화가났을까?

경험의 한계는 무엇일까? “경험의 한계란 우리가 인식만으로는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해서 느꼈을때 경험의 한계라고 부르는 것 같아” “경험의 한계를 경험의 차이라고 바꾸면 어떨까? 나는 느껴보지 못한 경험을 한 것일 수도 있잖아”

“선험적인 것 자체에 차이가 있을 수 있을까? 만약 그 차이를 안다면 후험의 차이도 알 수 있을텐데” “왜 인간은 슬퍼하고 기억하지 않을까? 비판적 사고능력이란 칸트에 의하면 가능하다고 하는데, 과연 가능한 것인가?” 우리는 이런 다양한 생각들을 나누면서 인식체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책을 읽으며 나눠 보기로 했다.


[우리의 인식은 모두 경험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만일 인식능력이 대상에 의해 비롯되지 않는다면 그 이외에 무엇에 의해 작용하도록 일깨워질 것인가? 그러나 우리의 인식이 경험에서 비롯된다 하더라도 모든 인식이 반드시 경험으로 일깨워 지는 것만은 아니다] – 39쪽

[따라서 경험으로부터 독립되고 모든 감각적 인상으로부터도 독립되는 인식은 일반적으로 ‘선험적’(a priori)이라 불리고 경험적 인식과 구별되며, 또한 경험적 인식의 원천을 ‘후험적’(a posteriori) 이라고 함은 그 원천이 경험 속에 있음을 말한다]- 39쪽
[우리가 선험적 인식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는 낱낱의 경험과는 관계가 없는 인식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경험에서 절대적으로 독립하여 성립되는 인식을 의미한다.] – 40쪽
*경험적 인식: 오직 후천적 경험에 의해서만 가능한 인식

[그렇다면 순수인식과 경험적 인식을 구별할 수 있는 징표는 무엇인가? 경험은 어떤 것이 그러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만, 그것이 그 밖의 다른 것일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필연성과 보편성은 경험과 순수인식을 구별할 수 있는 두가지의 징표이지만, 칸트는 우리의 인식능력의 순수한 사용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과 이 인식능력의 특징을 기술하는데 그치고자 하였다.]- 40~42쪽

[칸트에 의하면 어떤 종류의 인식은 가능한 일체의 경험 영역을 떠나서 경험에는 그에 대응하는 대상이 조금도 주어지지 않는 개념에 의해, 경험의 모든 한계를 넘어 우리 판단의 범위를 확장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이 연구를 중요성으로 보아 오성이 현상의 영역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것보다도 훨씬 탁월한 것으로 보고, 연구의 궁극 의도를 극히 숭고한 것으로 생각한다.]-43쪽

[순수이성에서 불가피한 과제는 ‘신’, ‘자유’, ‘불사’ 이다. 전적으로 이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본래의 학문이 형이상학이다. 따라서 오성이 어떻게 선험적 인식을 얻게 되었는지, 그 범위와 타당성, 그리고 그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적’으로 생각된다.] -43쪽


◇ 김현정> 그리스 아테네에 가서는 소크라테스가 걸었던 그 길을 걸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셨던 것 같은데 소크라테스가 참 억울하게 죽었잖아요. 억울하게 죽으면서도 악법도 법이다. 저는 이게 진짜로 한 말인지 알았는데 이게 가짜 뉴스예요?

◆ 유시민> 가짜 뉴스라고 딱 하기는 그런데 이제 해석을 하면 그렇게 해석을 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말은 아니죠. 그때 플라톤이나 크세노폰 같은 제자들이 일일이 언행을 기록했는데 거기 보면 원래 굉장히 철학적으로 깊은 의미를 가진 질문이었어요. 그러니까 ‘공동체, 폴리스가 자기가 속한 국가가 사회가 내린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서 내린 결정인데 자기를 사형시키기로 한 것이 내가 옳지 않은 결정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 결정을 회피하는 것이 옳은가? 만약 모두가 그렇게 한다면 폴리스가 유지될 수 있는가?’

◇ 김현정> 유지되겠는가?

◆ 유시민> 그게 칸트가 던진 질문하고도 비슷하고요. 철학적으로 굉장히 심오한 질문이에요. 그거에 대한 답이 소크라테스가 ‘그러면 안 된다’는 답을 내린 거고 그래서 간수를 매수해 놓고 제자들이 탈출하자고 했는데 그냥 독당근으로 만든 주스를 그냥 들이키고 죽잖아요, 거기서. 그러니까 이런 심오한 고민이 철학적 질문에 대한 답을 그런 식으로 한 건데 그걸 ‘악법도 법이다’ 이러면서 악법을 만들어놓은 당사자들이 시민들한테 법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수단으로 오랫동안 악용되어 왔어요,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유시민은 왜 칸트를 언급했을까?>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폴리스의 근원과, 질서유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칸트또한 근원적, 즉 선험에 대한 질문을 했기 때문에 그 성격이 비슷하여 언급하지 않았을까?”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지 않을까? 근본적 옳음이 무엇인가, 폴리스를 지키기 위한 선험적 옳음에 대한 질문이지 않을까?”

“폴리스의 구성원 모두는 본인의 인식능력을 가지고 폴리스(공동체)의 유지에 본인들의 삶을 헌신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본인만의 로고스로 그 모든 다른 인식에 대한 도전을 하고 부정을 하게 된다면, 후에 나올 악의적인 사례들(본인의 인식에 의한 이유가 없으면서 폴리스의 법을 반대하는 것)이 나올 우려가 있기 때문에 선험적 인식에 이뤄진 공동체의 규칙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