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물을 처음으로 직관할 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직관할 수 있는가? 그것이 우리 눈 앞에 나타나 있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그 사물의 용도나 목적 등은 경험을 제외하고는 알 수 없는 것이지 않을까?

사물을 직관하는 데 있어서도 경험을 제외한 순수의 직관만이 남았을 때, 우리는 무엇을 직관할 수 있을까?

선험적 순수직관이라는 말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우리가 사물을 바라볼 때, 예를 들어 ‘컵’이라는 것이 있을 때 과연 그 ‘컵’이 무엇인가를 담기 위한 용도인지, 컵의 손잡이가 잡기 위한 용도인지를 우리의 경험개념을 제외하고 그것을 알 수 있을까? 물체 자체에서 우리의 모든 경험을 제외한다면, 남아있는 가장 순수한 직관의 형태는 무엇일까?

우리는 42쪽의 물체에서의 경험개념에 대한 부분을 도식화하여 그 개념을 이해해보려고 시도했다.


[여러분은 물체라고 하는 경험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에 부수되는 일체의 경험적인 것, 즉 색깔이나 연하고 딱딱함, 무게 및 불가입성(不可入性)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제거하여 보자. 그렇게 하여도 이 물체가 차지하고 있던 ‘공간’은 남아 있다. 이 공간은 여러분이 제거할 수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물체적 또는 비물체적 대상에 대한 경험적 개념으로부터 경험이 가르쳐주는 모든 성질을 제거한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그러한 대상으로부터 대상의 실체 또는 실체에 속한 것으로 생각되는 성질을 제거할 수는 없다.] – 42쪽


위의 도식을 보면, 노란색 상자는 ‘물체’이다. 그리고 물체의 외부에는 그 물체가 있는 공간이 존재한다. 이 물체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경험의 개념을 모두 제거한다면 남아있는 것은 무엇일까?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이 물체에 대해 특정한 경험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 하는데, 이 물체에서 경험 개념에 해당하는 색, 경도, 무게 및 부피 등을 제거한다고 하더라도, 이 물체가 존재하던 기본적인 ‘공간’ 그 자체는 제거되지 않고 남아있다고 이야기했다.

따라서, 공간 그 자체는 제거되지 않고 선험적으로 남아있는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에 동의했다.

우리는 선험적 인식의 두가지 형식적 조건인 시간과 공간을 다음에 읽어보고, 그 두가지 형식이 어떻게 선험적이고 종합적인 ‘판단’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생각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