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

르네상스를 지나 17세기에 들어서면서 광기는 수용의 체계 속으로 편입된다.

▶ 대감호 (17~18세기)

113쪽 / 르네상스 시대에 목소리는 풀려 나왔지만 이미 폭력성이 제어된 광기가 고전주의 시대에는 이상한 강제력에 의해 곧 침묵으로 귀착하게 된다.

116쪽 / 광기는 데카르트의 회의(懷疑)에 의해, (즉,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이야기로 인해) 비이성적인 말을 하는 것이 생각되지도 않고 존재하지도 않는 것으로 취급되어, 의심하는 자의 이름으로 추방당했다.

117쪽 / ‘인간’이 어느 때건 미칠 수 있다 해도, ‘사유’는 진리를 인식해야 할 입장에 놓인 주체의 절대적 실천으로서 무분별할 수가 없다.

130쪽 / 17세기의 구빈원은 원호와 동시에 탄압의 기능을 한다. 이성의 특권으로 규정하는 것이 관례인 시대에 사람들이 광기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가졌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인식방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30쪽 / 빈곤과 구제의 의무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 실업과 무위도식이라는 경제문제 앞에서의 새로운 반응형태, 새로운 노동윤리, 그리고 속박의 강압적 형태 아래, 이 활동은 도덕적 의무가 민법과 일치할 삶의 공간에 대한 꿈을 하나의 복합적 단위 안에서 조직해 내는 것이다.

130-131쪽 / 수용방안의 실천은 빈곤에 대한 새로운 처방이자 새로운 각오이고, 더 넓게는 인간의 삶에 있을 수 있는 비인간적인 것에 대한 인간의 또 다른 관계설정을 가리킨다. 중세에는 가난한 사람, 비참한 처지의 사람, 자기 자신의 생활에 책임을 질 수 없는 사람이 특별한 모습으로 취급되지 않았는데, 그것이 16세기에는 달라진 것이다.

134쪽 / 그러나 이 경험은 인간에게 사회에 대한 의무만을 부여할 뿐이고 비참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무질서의 결과와 동시에 질서의 장애를 보여준다.

135쪽 / 이제부터 빈곤은 굴욕과 영광의 변증법적 관계가 아니라, 무질서를 죄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질서와 무질서의 어떤 관계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138쪽 / (모든 기독교인들은) 가난한 사람을 “동정심의 원인인 물질적 빈곤 때문이라기보다는 혐오감을 자아내는 영적인 비참 때문에 국가의 쓰레기 같은 존재”로 보기 시작한다.

139쪽 / 따라서 모든 수용자는 이러한 윤리적 가치 평가의 대상이 됨으로써 실로 인식이나 연민의 대상이기 이전에 ‘도덕 문제’의 대상으로 취급된다.

140쪽 / 이제는 (신의 현현을 경험하고 구원에 이르도록 돕는다는,) 빈곤의 신비로운 의미가 상실되었다. 기독교도는 이제 국가의 질서와 예측에 따라서만 빈곤문제에 개입할 수 있다.

140쪽 / 바로 여기에 고전주의 시대에 광기를 감금하게 될 주요한 고리들 중의 첫 번째 고리가 있다.

141쪽 / 17세기에 광기가 ‘신성을 잃은’ 듯한 것은 우선 빈곤이 도덕의 지평에서만 지각됨으로써 빈곤의 위세가 실추되었기 때문이다.

142쪽 / 이제부터 광기는 빈곤의 권리와 영광을 잃고 가난 및 무위도식과 더불어 아주 무미건조하게 국가의 내재적 변증법의 논리 속에서 출현한다.

142-143쪽 / 수용과 통치의 필요성이 증대되면서, 노동의 절대적 필요성이 수용을 불가피 하게 만들었다. 구빈원의 임무는 “모든 무질서의 원천으로서의 구걸과 무위도식”을 막는 것으로 단번에 정해진다.

157쪽 / 광인은 이제 이러한 무위도식의 맥락에서 대대적인 추방에 휩쓸린다. 광인이 저절로 부르주아 질서의 경계를 넘어서고 부르주아 윤리의 신성한 한계 밖으로 소외되기 때문이다.

159쪽 / 사실상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노동의 의무는 윤리의 실천과 동시에 도덕의 보증이라는 의미를 띠게 된다.

159쪽 / 역사상 처음으로 도덕적 의무와 민법 사이의 놀라운 종합이 이루어지는 도덕성의 기관이 설립된다. 이제는 국가의 질서가 감성(感性)의 무질서를 용납하지 않는다.

160쪽 / 이 대감호에서 본질적인 것이자 새로운 귀결인 것은 형벌이 더 이상 법률에 따라 선고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순수한 도덕성의 구역에서 감금이 행해지는데, 거기에서 법은 감성을 지배하게 되어 있을 것이고 타협도 경감도 없이 엄격한 신체 속박의 형태로 적용 될 것이다. 도덕률의 철저한 적용은 더 이상 완성의 여부에 달려있지 않다. 도덕률은 사회의 종합적 차원에서 시행될 수 있다. 도덕이 상업이나 경제처럼 관리된다.

164쪽 / 수용은 결과적으로 17세기의 경제적 조치 겸 사회적 예방책으로서 값어치가 있게 된다. 그러나 비이성의 역사에서 수용은 결정적 사건으로 광기의 의미 자체를 굴절시킨다.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자유로운 대결도, 이성을 피할 수 있거나 이성을 거부하려 하는 모든 것을 헤치고 나아가려는 이성의 시도도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164쪽 / 맹위를 떨치는 비이성에 대한 이성의 승리가 사전에 마련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성이 순수한 상태로 군림한다.

165쪽 / 수용의 장벽 이면에는 가난과 광기뿐만 아니라 훨씬 더 다양한 얼굴들과 공통되는 특징을 알아보기 쉽지 않은 모호한 모습들이 있다.

168쪽 / 근대인이 ‘소외된’ 광인의 진실을 가리킬 수 있게 된 것은 우리에게 광인과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그토록 많은 다른 얼굴들 사이로 광인이 추방되어 있는 그 소외의 영역이 광인에 의해 독점되고 상징되기 훨씬 이전에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71쪽 / 그러므로 우리가 검토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지로 보이는 것에 관한 우리의 앎이 아니라 이 경험이다. 그러면 광기가 세계 안에 얼마나 친숙한 것으로 자리잡고 있었는가를, 그리고 광기가 점차로 친숙하지 않은 것으로 변해갔다는 것을, 그렇다고 해서 그토록 위험한 연관성이 단절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85쪽 / 즉, 고전주의 시대는 비이성을 오랫동안 서로 대단히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경험들의 공통분모로 발견한 것이다. 고전주의 시대는 광기를 중심으로 일종의 유죄성의 분위기를 형성하면서 일단의 단죄될 행동 모두를 하나의 범주로 묶었다.

197쪽 / 18세기 말까지 자유사상은 서로 이질적인 두 가지 형태로 존속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모든 비이성이 불합리의 모습을 띠는 합리주의를 통해 스스로를 표명하려는 이성의 노력이 진행될 것이고(계몽),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의 말을 감성의 무분별한 논리 쪽으로 구부러뜨리는 감성의 비이성이 작용할 것이다.(자유사상)

197쪽 / 이제 후자에 해당하는 자유사상은 비이성 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202쪽 / 17세기부터 비이성은 인간적 현상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면서, 사회인들의 장(場)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난 변종의 모습이다. 비이성적인 인간들은 사회가 식별하고 분리하는 유형들이다. 즉, 방탕한 사람 낭비자, 동성연애자, 마법사, 자살자, 자유사상가가 있다.

203쪽 / 17세기부터 비이성의 인간은 어떤 실제의 사회 세계에서 징집된, 그가 소속된 사회에 의해 재판받고 정죄되는 구체적 인물이다. … 그 비이성적 인간들을 그들 자신이 사고 있는 공동체의 국외자로 고발하기 위해서는 비이성의 진실을 외면하고 비이성을 사회 세계의 공간에만 가두는 이 최초의 소외가 선행되어야 한다.

205쪽 / 이렇게 구조화된 영역에는 “수용 적합”이라는 비이성의 꼬리표가 붙을 것이다.

207쪽 / 이러한 모든 비이성에 대한 통일성은 인식의 진행에 결정적일 뿐만 아니라, 징벌의 측면에서 “교정해야 할 생활”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과 상관관계가 있는 ‘비이성적 생활’의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도 중요성을 갖는다.

▶ 수용과 입원 (사회의 추문 vs. 법적 체계)

211쪽 / 구빈원이 창설되고 독일과 영국에서 최초의 교도소가 개설된 시기에서 18세기 말까지 고전주의 시대는 감금의 시대이다.

212쪽 / 우리가 광기에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미분화된 수용의 형태를 적용한 것은 광기의 실증적 징후에 계속해서 눈을 감아 버림으로써 광기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212쪽 / 사실상 실질적 문제는 정확히 ‘우리의’ 구별을 확증하지 않는 것, 그리고 우리라면 돌보았을 이들과 우리라면 정죄하고 싶어했을 이들을 동일한 방식으로 추방하는 그 판단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이다.

213쪽 / 17세기와 18세기가 광기를 질병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두 세기에 걸쳐 광기가 다른 지평 위에서 인식된다는 것이다.

224쪽 / 17세기 이전에 광인이란 인물은 이미 개인으로서 충분히 독립적인 존재였다.

227쪽 / 그런데 17세기를 특징짓는 것은 오히려 광인이 더 어렴풋하게 구별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227쪽 / 고전주의 시대의 광인은 개체성의 표지를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고전주의 시대의 광인은 비이성의 일반적 이해 속으로 사라진다.

233쪽 / 원래대로라면 교회법과 로마법에서 광기의 인정(認定)은 의사의 진단으로 결정되는 것이었다. 모든 정신 이상의 판단에는 의료의식이 내포되어 있었다.

235쪽 / 그런데 수용의 실천은 전혀 다른 유형으로 구조화되고, 어떤 식으로도 의학적 판단에 종속되지 않으며, 다른 의식의 영역에 속한다.

238쪽 / 광기의 사실여부를 결정하고 광인을 격리시킬 수 있는 것은 의료 과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추문에 민감한 의식이다.

239쪽 / 궁극적으로, 광기에 대한 의식은 형식과 의무가 분석되는 법적 주체로서의 인격과 관련된 어떤 경험의 영역에 속하고(법, 의학), 다른 하나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과 관련된 어떤 경험에 속한다(수용, 도덕).

244쪽 / 정상인의 개념은 창안물이고, 정상인을 위치시켜야 하는 곳은 자연의 공간이 아니라 ‘사회인’을 법적 주체와 동일시하는 체계이며, 따라서 광인이 광인으로 인정되는 것은 광인이 질병으로 인해 정상상태의 가장자리 쪽으로 옮겨졌기 때문이 아니라 광인이 우리 문화에 의해 수용의 사회적 명령과 권리주체의 능력을 판별하는 법률적 인식 사이의 접점(接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246쪽 / (수용과 입원) 두 영역이 부분적으로 겹치기는 했을 터이지만, 이것들은 언제나 중심이 서로 달랐고,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가지 형태의 정신이상을 결정했다. 하나는 주체성의 제한 같은 것으로, 개인이 지닌 능력의 한계를 정하고 개인의 무책임 영역을 획정하는 선(線)으로 파악된다. 정신 이상의 다른 형태는 이와 반대로 광인이 사회에 의해 이방인으로 인식되는 의식화를 가리킨다.

▶ 공연되는 광기, 그리고 19세기

250쪽 / 광기에 대한 이해방식은 마치 수용에 의해 자율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광기가 장애로만 나타나는 어떤 도덕영역에 연결되어 있는 듯 하다.

251쪽 /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합리주의는 역설적으로 이성이 착란되지는 않으나, 도덕생활이 전혀 바르지 않고 의지가 사악하다는 점에 비추어 인식될 그러한 광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듯하다.

253쪽 / 광기와 범죄 사이에 배제관계가 아니라 광기와 범죄를 묶는 내포관계가 엿보인다. 광기는 악에 연결되어 상상적 초월의 형태를 띠었던 반면에, 이제부터는 개인의 선택과 불량한 의도라는 더 은밀한 경로를 통해 악과 소통한다.

253쪽 / 수용의 세계에서는 어떤 것도 광기에 의해 설명되거나 정당화되지 않는다.

253쪽 / 그만큼 우리는 광기를 인간의 궁극적이고 동시에 순수한 진실로 여기는 습관에 익숙해져 왔다. 그러나 17세기에는 동일한 죄악 전체 속에서 정신착란이 비방에 추가된다. … 마치 심리적 설명이 도덕적 비난을 배가시키는 듯이 모든 일이 진행된다.

257쪽 / 광기와 악 사이의 모호한 관계를 통해 광기는 도덕의 세계에 뿌리를 내린다.

259쪽 / 윤리는 비이성에 반대하는 선택으로서, 미리 준비된 모든 사유의 시초(始初)부터 현존하고, 성찰을 따라 한없이 연장되는 그 표면은 이성의 주도권(主導權) 자체인 자유의 경로(經路)를 나타내는 것이다.

259쪽 / 고전주의 시대에 이성은 윤리의 공간에서 탄생한다.

260쪽 / 19세기에 이성은 자유로운 선택의 공간에서가 아니라 실증적 필요성의 기반 위에서 비이성과 관게를 설정하려고 하게 된다.

261쪽 / (피넬의 시대에 일러) 이성과 윤리의 근본적 관계가 도덕과 이성의 부차적 관계로 뒤바귀고 광기가 외부로부터 이서에 초래된 무의지적 재난(災難)에 지나지 않게 될 때에야, 구빈원에서 광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은 분명히 밝혀지게 되고 이러한 상황에 대해 사람들은 두려움 섞인 혐오감을 내보이게 된다. 사람들은 “무고한 이들”이 “죄인”으로 취급되었다는 사실에 분개하게 된다.

261쪽 / 인간이 광기에 대한 본래의 관계를 변화시켰고 인간 자신의 사회적 능력에 비추어서만, 그리고 인간에게 일어나는 질병이라는 사고로만 이 관계를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17세기나 18세기는 광기를 ‘인간적으로’ 다루는 것이 전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광기는 이를 테면 인간으로 하여금 합리적 본성의 자유로운 실천을 시작하게 만드는 선택의 이면을 형성하는 당연히 비인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265쪽 / 그런데 이러한 은폐의 대상에 예외가 하나 있다. 광인의 경우가 그것이다.

265쪽 / 비이성의 악의 형태들은 철저히 감추어졌다. 그러나 광인은 성문 주변에서 구경거리가 되었다.

266쪽 / 광기는 조용한 보호소에서 구경거리로 떠오르고 모든 이의 즐거움을 위한 추문이 된다.

267쪽 / 이제는 광기 자체, 실제의 광기가 공연된다.

272쪽 / 광기는 바라보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냉혹성은 곧 광기 자체가 인간 본성의 영도 안에서 인간을 놓기 시작하기 위함임을 알게 된다.

272쪽 / 고전주의 시대에 광기에의 동물성의 현존은 특이한 섬광(閃光)을 반하면서 “광인은 병자가 아니라는” 바로 이 사실을 나타낸다.

273쪽 / 기이하게도 이성의 혼란은 동물성으로의 회귀로(回歸路)를 통해 자연의 직접적 호의를 광인에게 다시 가져다준다.

273쪽 / 그래서 광인의 동물성이 드러나는 이와 같은 극단적인 지점에서 광기는 예전보다 더 의학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거이 되고, 더 한층 교정의 영역에 속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273쪽 / 광기가 동물성으로 귀착되면서, 광기의 진실과 동시에 광기의 치유법이 발견된 셈이다. 광인이 짐승이 되었을 때, 광기를 추문으로 만드는, 인간 속에 동물이 현존하는 현상이 사라진 것은 동물이 잠잠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277쪽 / 아무튼 수용을 통해 ‘비이성적인 것의 부도덕성’에서 추문을 면하게 하려고 애쓴 시대에 수용에 이해 고양(高揚)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광기의 동물성’이다.

278쪽 / 신의 광기가 인간을 빚어낸다는 것은 다만 이 세상에 사는 비이성적 인간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지혜일 뿐이다.

279쪽 / 그러나 기독교적 이성이 그토록 오랫동안 일체를 이루었던 광기에서 벗어나는 시기에, 광인은 이성의 폐기와 동물성의 맹렬한 기세를 통해 특이한 논증력을 부여받는다.

281쪽 / 광기를 존중한다는 것은 인간적 진실의 그 하부한계, 우발적이지 않은 보질적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281쪽 / 광기는 인간성의 가장 낮은 지점인데, 하느님은 강생(降生)의 삶 동안 이 지점에 이르렀고, 그럼으로써 속죄되고 구원받을 수 없는 비인간적인 것은 인간에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282쪽 / 광기인 것은 인간이 짐승으로 구현되는 사태인데, 이것은 타락의 마지막 단계로서 인간의 허물을 가장 분명하게 나타내고, 신이 베푸는 호의의 최종적 대상으로서 보편적인 용서와 되찾아진 무구(無垢)의 상태를 상징한다.

283쪽 / 광기가 병리학으로 귀속(歸屬)되는 것은 어쩌면 몰수(沒數)로, 우리 문화의 역사에서 오래 전부터 준비되었을 터이지만 결코 광기이 본질 자체에 의해 결정되지는 않았을 일종의 재난(災難)으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

285쪽 / 그러나 광기에 고유한 중요성을 광기에게로 되돌려줄 수 있으려면, 광기를 비이성의 자유로운 지평 위에 다시 위치시켜야 한다.

287쪽 / 그렇지만 고전주의의 실천과 구체적인 의식(意識)에는 비이성으로부터의 거리 전체를 순식간에 가로지르는 특이한 광기의 경험이 있는데, 그것은 윤리적 선택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동시에 동물적 광포함 쪽으로 온통 기울어져 있다. 실증주의가 이 양면성을 단순화한 것은 사실이라 해도, 실증주의는 이 양면성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

287쪽 / 19세기와 우리 시대에 정신의학을 담당한 이들은 정신의학의 병리학적 객관성에 입각해서만 광기에 대해 말할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비이성의 윤리와 동물성의 추문이 여전히 깃들여 있는 광기를 대상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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