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실체라고 알고있는 것은 수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실체의 모델과 동일한가? 자연이 가지고있는 모순은 자연법칙의 모순일까 인간의 인식의 한계인가?

아인슈타인이 이야기한 광전효과는 다음과 같다. 어떤 특정한 금속판에 빛을 비출 때, 금속에서 전자가 튀어나오게 되는데, 아무리 빛의 세기가 세더라도, 튀어나오게 되는 전자의 최고속력이나 최고에너지가 변하지는 않는다. 다음과 같은 실험에서 전자의 최대에너지가 왜 무한대로 뻗어나가지 못하는지, 빛의 최저 진동수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는 고전물리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이었다(p26). 그 후, 빛의 상태가 파동의 형태를 띄고있다는 가설을 통해 그 파동이 때로는 이중상쇄를 하거나, 이중슬릿을 통과하는 빛의 파동이 무작위로 스크린에 나타나는 것을 증명하여 빛이 실제로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빛이 파동일 뿐이라고 이야기하기엔 빛 자체가 그 속에서 알맹이 처럼 움직이는 경우도 관찰되기 때문에 우리가 빛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지속적 논의들이 필요했다.(p32)

이중슬릿 실험을 반복해서 광자들의 이미지를 투과하는 실험을 반복하다 보면, 불연속적인 입자들이 무작위적으로 점을 만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특정한 파동의 형상을 띠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점들의 모임이 규칙적인 파동의 형태 라고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실제로 광자의 불규칙적인 모습이 파동성과 입자성을 둘다 가지고 있지만, 그 어느쪽의 특성을 다 가지고있지는 않다.(p37) 물리학자들은 광자가 가지고 있는 이중성과 그것의 불확실함을 끊임없이 줄여 나가고자 했다..

그 후, 원자물리학에서 역학적 모델이 이중성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몇몇 물리학자들은 수학적 모델로 사람들을 안내했다. 그들은 “전자 자체를 보지 말라” 라고 경고하면서 동시에 실험실에서 전자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예측할 수 있는 수학 방정식을 찾자고 주장하게 되는데, 그러한 방식은 슈뢰딩거의 ‘파동함수’ 라고 하는 공식으로 나아가게 된다(44p). 파동함수는 불연속성을 묘사할 수 있는 함수인데, 불규칙적인 진동수를 가지고 어떻게 그 에너지가 분출될 수 있는지를 그려낼 수 있는 수식으로 풀이한다. 이 함수는 양자시스템에 대한 정보를 표현하는 기본 공식으로 사용된다(p51). 양자물리학자는 전자 자체를 직접 추적할 수 없다. 그 대신에 파동함수를 계산한다. 물리학자들이 전자총을 만들어 전자를 쏘는 실험을 한다고 가정할 때, 양자물리학자들은 전자의 파동이 화면을 치기 전에는 파동으로 존재하다가, 화면 위의 한 점으로 그 파동이 붕괴되는 현상이 발생한다고 이야기한다. 전자가 도착해서 찍힌 점들은 무작위 위치에 도착한 자국이 되고, 그러한 자국들은 총이 쏘아지면 쏘아질수록 예측 불가능하게 남아있을 뿐이다(p53). 다음과 같은 무작위성은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은 제거할 수 있지만, 무작위성과 불확정성이라는 점에서 기존 물리학의 법칙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과법칙을 위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작위성이 시사하는 바는, 파동함수가 전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확률을 이야기한다는 점에 있다. 불규칙성이 특정한 파동을 가지는 것을 모니터를 통해 우리는 확인할 수 있으며, 파동함수가 즉 전자 자체가 아닌 전자의 이동 범위에 대한 확률임을 우리는 알 수 있게 되었다(58p)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파동함수는 전자가 화면을 때리기 전까지는 파동의 형태로 남아있다. 하지만 전자가 화면에 정지할 때 파동함수는 성격을 완전히 바꿔 전자가 있는 곳의 위치를 확실하게 알려준다. 이것은 기존의 운동법칙을 완전히 거스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움직임의 이유를 많은 사람들이 설명해내지 못했다. 그저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처럼 설명은 하지 못하고 묘사하는 데만 그친 이 파동함수가 기존 양자역학에서도 그저 ‘자연이 행동하는 방식’이라는 말을 통해 우리를 멈추게 했을 뿐이다.

양자역학의 규칙들은 그저 수식처럼 명확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의 이론이 실제로 왜 그런지, 그것을 설명해야 하는 순간 물리학자들은 오류에 빠지게 된다.(87p) 과학은 기존 물리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대로 명확하고, 빈틈이 없어야 했다. 그래야 그것이 보편적일 수 있고, 절대적인 지식이 될수 있기 때문이었다. 과학은 이럴수도 있고, 저럴수도 있다는 확률에 대한 이야기를 부정했고, 확률은 객관적이지 못하다고 이야기했다. 양자 베이지어니즘-큐비즘은 그 부정확성의 과학에서 나온 것이다. 고전 물리학자들은 물리학 실험이 이론상으로 단순하고, 반복 가능하고, 정량화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빈도 확률론을 일부 채택하기도 했지만,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큐비즘의 특성을 본인들의 학문으로 가져오는 것을 상상하길 꺼려했다(객관의 학문에 주관이 들어온다 생각했기 때문에). 베이지언 확률은 어떤 외부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의 진실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행위자의 개인적 ‘신뢰도’를 측정한다. 그리고 그 신뢰의 ‘정도’를 정량화 함으로써 확률의 범위를 줄여 학문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한다.

이러한 주관적 확률을 다루는 베이지어니즘이 확률 개념에 의존하는 양자역학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111p)

과학의 기존 세계관은 “‘보편성’을 위하여 ‘개인성을 제거해야한다”. “’신뢰’는 ‘지식’ 즉, 과학의 정반대의 영역이다” 등으로 표현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파동함수의 붕괴를 설명할 수 있는가? 큐비즘은 해결할 수 있다. 계산된 파동함수는 나중에 하게 될 경험에 따른 관측에 대한 사전 확률을 제공한다.(115p) 한번 관측이 이루어지면 탐지기는 그 입자를 감지하고, 스핀의 방향, 속도 등을 알 수 있게 되며, 그것은 실험자(행위자)에게 유용한 정보가 된다. 그렇게 되면 파동함수를 실험자는 갱신하게 되고, 잃어버린 불확실성에 대한 과학의 불안은 눈 녹듯 사라지게 된다. 일단 실험의 불확실한 결과가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결과를 통해 불확실성의 확실성을 깨달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확률을 갱신하여 불확실성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이다! 파동함수는 전자들에 속박되어 있지 않고 성자의 머리 위에 광륜처럼 맴돈다. 그들은 행위자에 따라 지정되었고, 행위자에게 유효한 모든 정보에 의존한다(118p)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큐비즘에 의해 구해질 수 있다. 큐비즘은 상자를 열어보기 전에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우리는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애셔 페레스는 “~이면 어떻게 될까?” 라는 질문은 양자역학은 허용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며, 행하지 않은 실험은 어떠한 결과도 갖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겼다. 큐비스트에 따르면, 파동함수는 고양이가 살아 있음과 죽어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 상자를 열고 그 이후 관측자가 알 수 있는 정보에 대한 신뢰를 줄 뿐이다. 고양이를 실험을 위해 넣었다면, 실험을 하면 된다. 하기 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124p)

우리는 감각을 통해 정보를 얻는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감각을 제외한 대상 자체만을 실재로서 설명하길 원한다. 따라서, 대상의 행동을 기술하려는 관찰자는 기존의 과학의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과연 모든 지식에서 감각을 분리해 낼 수 있을까? 감각은 자신이 자연의 기술에서 분리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실재 만을 다루길 원하는 과학자들의 태도는 자연스럽게 현실보다는 그저 이론만을 탐구하게 되고, ‘영토’에서 ‘지도’로 시선을 옮기게 되었으며, 감각의 경험을 통한 인식을 ‘주관적’인 것으로 두었다. 하지만 양자이론의 선구자인 닐스 보어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자연을 기술하는 과학자의 목적은 현상의 실제 본질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경험들 사이의 관계를 가능한 한 멀리 추적하는 것이다”(130p). 양자역학의 의미는 무엇일까? 고전 물리학이 이야기한 것처럼 그저 미시적으로 어떻게 원자와 분자들이 구성되어 있는지를 파악하면 되는 일인가? 양자역학을 통해 양분 되어지는 객관성과 주관성을 우리는 어떻게 합치 시킬 수 있을까?

데이비드 머민은 큐비즘을 통해 다음과 같은 논의들을 그만두자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양분은 개인의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며, 나아가 나의 경험과 인식만이 내가 겪을 미래의 요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 상태로는 알 수 없는 고양이의 생사 여부를 이야기 할 수 없으며, 미래에 일어날 자신의 신뢰만이 그 실험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객관성만을 요구하던 ‘지성’이 ‘감각’을 존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과학의 세계에서.(135p)

큐비즘이 주장하는 양자 물리학에서 표현되는 국소적이다(151p). 왜냐하면 어떤 행위자가 개인의 경험 내용에 대한 신뢰도를 조직화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목표의 전부이기 때문이다.(153p)

큐비즘은 그저 개인의 신뢰도를 이야기 하는 것일 뿐, 그것이 실제 세계를 수식화 하여 묘사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오히려 실험을 통해 파동함수가 가지는 확률의 값이 확실해지고, 그러한 확실성이 신뢰도의 값을 가져야 하는 인간의 영역에서는 불가능 하다고 이야기한다. 우리시대의 큐비즘은 확실성이 믿음의 한 형태라고 이야기한다.

큐비즘은 특정한 한 인간, 행위자 한 명의 경험을 말한다.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양자역학 사용자가 자신의 경험을 조사하고 조직화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큐비즘에 따르면 양자역학은 세계의 기술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기술이다(p167). 우리의 미래 경험은 확률로만 기술된다.

인간 자유의지의 독립성이 자연법칙의 객관성과 어떻게 조화가 될 수 있을까?
자연법칙은 통찰, 직관, 상상, 그리고 본능을 통해 우리와 마주한다(171p) 하지만 위의 질문은 큐비즘에 의하면 조화가 되지 않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큐비즘은 사물들이 자연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그들이 하는 방식대로 움직이기에 자연의 법칙이 발명되었다고 이야기한다. 큐비즘을 통해 우리는 확실성의 수준을 정량적으로 1에 가까운 수준으로 올렸지만, 1이라고 확신하지 않는다. 작은 의심이 남아있음을 우리가 허용함으로써 우리는 미래의 우리들을 남겨둘 수 있기 때문이다(175p)

우리는 경험의 세계를 초월한 외부의 세계를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큐비스트들에 따르면, 실제 세계는 우리 자신의 외부에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과학자임을 주장하며 양자역학이라는 학문의 참여자로 실험실에 간다. 그리고는 양자 시스템을 준비하는 장치를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라 설치한다. 우리는 그 실험을 통해 나타날 수 있는 주관적 확률을 계산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상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다. 그저 어떤 가능성이 내 눈앞에 있는지를 우리 스스로가 결정할 뿐이다. 푹스는 이야기한다. 양자 측정 속에서 우리의 주관으로 세계의 실재와 접촉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외부의 세계(미래)가 있음을 주관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고.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날 지의 선택은 자유의지를 가진 자신에 의해서도 아니고, 자연의 법칙의 명령에 의해서도 아닌 그 둘의 충돌에 의할 뿐이다. 양자역학은 그것의 관계를 묘사해줄 수 있을 뿐이고, 그것의 파동의 여부는 주관이 선택한다(183p)

우리는 실제를 인식한다. 하지만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주관에 의해 다양한 방법으로 묘사되고 설명된다. 파인만은 다양한 경험의 재구성을 통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실제들을 간단하게 묘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잘 모르지만 경험으로 배웠기 때문에 알 수 있다고 또한 용기를 준다.

우리의 경험으로 알 수 있는 세계의 모습이, 나의 주관과 인식에 의해 관계지어지고, 다양한 우리의 경험으로 재구성 되어 묘사될 수 있다면, 개인의 경험은 과학의 분야에서 더욱 중요한 힘을 얻게 되지 않을까?(20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