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역학(quantum physics)은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미시세계를 탐구하는 학문이라고도 이야기한다.

양자(quantum)라는 개념은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에 의해 창안되었는데, 플랑크는 우리가 물체를 볼 수 있는 이유는 물체가 가지고 있는 파동이 에너지처럼 존재하고, 그 물체를 비추는 빛과 우리의 눈이 서로 상호작용 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는 양(quantity)화 되어있다고 이야기했는데, 에너지의 양이 해당 물체의 진동자와 비례한다는 주장으로 e=hf 라는 식을 만들어 내었다. 후에 그 진동자는 원자와 분자의 움직임으로 알려졌고, 에너지의 꾸러미는 양자 라는 것이 밝혀 졌지만, 플랑크의 수식은 후에 양자역학이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알게 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영의 이중 슬릿 실험

초기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고전 물리학자들은, 빛이 양적으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입자의 형태로 존재하는지를 연구하기 위해 빛을 금속판에 쏜 후, 광자를 튀어나오게 하여 그것을 직접 관찰하는 실험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빛의 색에 따라서 전자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에너지가 존재하였고, 아무리 빛을 많이 쏜다고 하더라도 전자의 최고 속력 또는 최고 에너지를 늘리기는 역부족이었다. 나중에 빛이 파동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알게 된 물리학자들은, 이중 슬릿 실험을 통해 파동을 가지고 있는 빛을 두개의 슬릿을 이용해 벽에 비추는 실험을 진행했다. 그 결과, 간섭무늬의 형태가 벽에 나오는 것을 확인했고, 그들의 주장을 확고히 했다.

하지만 여전히 질문들은 남아있었다. 빛은 파동의 형태인가? 아니면 입자들 각각의 모임인가?

이중슬릿 실험은 처음 쏜 빛이 결과론적으로 파동의 모양을 스크린에 띄기 때문에 빛이 파동임을 알 수 있다고 하지만, 그 파동의 형태는 사실 불규칙 적인 점들의 모임이다. 이런 불규칙적인 점들은 도대체 무엇이며, 이 점들의 움직임을 우리는 예측할 수 있을까?

20세기 초, 물리학자들은 빛이 파동과 이중성을 둘 다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왜 그런지 설명해내기는 불가능했다. 전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기술해 낼 수 있어야 파동의 형태인지, 또는 입자의 형태인지를 확신 할 수 있었지만, 우리가 원자 주변을 돌고 있는 전자를 확인하는 그 순간 전자는 한 점에서 고정되거나, 우리의 관측 범위 밖으로 튕겨나가 버린다. 이것이 하이젠베르크가 주장한 불확정성의 원리(전자의 위치와 속도가 한번에 측정 될 수 없음)이며 이것은 코펜하겐 해석의 핵심 내용중 하나이다.

이러한 불연속성은 과학의 영역에서는 매우 불쾌한 사실이었다. 과학자들은 물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예측하는 공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이야기했고, 이는 하이젠베르크의 행렬함수와 슈뢰딩거의 파동함수를 통해 원자가 어떻게 도달할지를 예측하는 수식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양자역학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위와 같은 수식의 형태가 아니다. 위에서 이야기했던 이중슬릿 실험으로 돌아가보면, 우리는 빛이 파동의 형태를 띄다가 벽에 가서 부딪힐 때는 점의 형태로 파동이 붕괴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전 물리학자들은 이것을 이중성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양자역학은 그 초점을 ‘관측’에 둔다. ‘관측’을 한다는 행위는 우리가 파동을 가지고 있는 빛의 형태의 한 점(point)을 보게 되는 것인데, 신기하게도 전자는 우리가 ‘관측’을 하는 순간 점의 형태로 모습을 바꾸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이중 슬릿 실험에서 전자가 단 한발만 발사되는 상황이 존재하더라도 우리가 관측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두 구멍을 통과하여 간섭무늬를 띈다. 하지만 우리가 관측을 하는 순간 오로지 한 구멍만 통과한다는 점이다.

우주의 관점에서, 우리가 ‘관측’하는 행동을 통해 물체와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파동의 형태로 존재의 가능성만 띄다가, 우리가 ‘관측’을 하게 되는 순간 그것이 우리에게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원자 내의 공간, 미시세계에서는 공간이 불연속 적으로 존재하며, 전자 또한 연속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 관측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순간 이동을 가능하다고 이야기하게 된 것이다. 이는 ‘양자 도약’이라는 개념이라고 불리며, 전자의 움직임이 불연속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은 전자를 ‘양자화’ 되어있다고 이야기했으며, 이러한 전자의 움직임을 설명해 내는 학문 ‘양자역학’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슈뢰딩거는 파동역학 이라는 학문을 통해 양자의 움직임이 불연속적이지 않고 예측 가능함을 주장하며 위와 같은 불연속성을 부정했다. 따라서 미시세계에서의 불연속성에 대한 논쟁이 과학계에서는 지속적으로 존재했다. 하지만 실제 현상들이 ‘관측’을 중요시한 불연속성의 영역과 조금 더 가까웠기 때문에 과학자들 사이에서 위와 같은 불연속성을 미시세계에서만 한정하는 것으로 합의를 하게 되었다.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슈뢰딩거의 고양이

하지만 슈뢰딩거는 1935년 양자역학의 불연속성이 만들어내는 역설을 지적하는 논문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발표했다. 만약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관측’이라는 것을 통한 상호작용이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상자 안에 고양이를 넣고 그 고양이를 죽게 할 수 있는 독가스가 조건에 따라 분사 되게끔 만든 후 상자를 덮었을 때, 관측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양이는 죽어있는 상태인가? 살아있는 상태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고양이는 삶과 죽음이 중첩된 상태인가? 라는 모순을 지적한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가 관측 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 상태가 중첩되어 있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관측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결과를 보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슈뢰딩거가 주장하는 역설은 역설이 아니라 그것이 우주의 본질임을 많은 과학자들이 재 반박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천으로 우리가 ‘관측’을 할 수 없게 가렸다고 하더라도, 상자의 안과 밖은 진공상태가 아닌 상태에 놓여져 있고, 상자 자체를 통해 우리가 상자의 안과 상호작용 하고 있기 때문에, 즉, 우주의 물리학에서 우리는 이미 ‘관측’의 단계에 놓여져 있기 때문에 상자 속의 고양이는 상자를 열든 열지 않든 죽음과 삶 둘 중 하나의 분명한 상태를 가진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다음주 양자 베이지어니즘(QBism)과 파인만의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 더 양자역학이 다루는 실제 세계의 일들에 조금 더 집중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