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눈먼 사람들의 세상에서만 모든 것이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80쪽]

눈이 먼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끔찍한 일이다.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들고, 그 두려움의 불씨는 서로에게 쉽게 옮겨 붙는다.

그러나, 눈이 먼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진실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보는 것만을 믿어왔던 세상에서, 우리가 보지 못했던 사실, 보고싶지 않았던 세상의 진실들이 보여지게 된다.

책 속의 수많은 눈먼자들은 두려움에 빠진다. 그리고 그들은 본능만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두려움에 빠진 눈먼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생존과 본능적 욕구 뿐이었다.

[“두려움은 실명의 원인이 될 수 있어요,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가 말했다. 그거야말로 진리로군, 그것보다 더 참된 말은 있을 수 없어, 우리는 눈이 머는 순간 이미 눈이 멀어 있었소, 두려움 때문에 눈이 먼 거지,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계속 눈이 멀어 있을 것이고.” 184-185쪽]

책속에서 작가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한다. 눈이 먼다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지. 혹은 우리가 눈을 뜨고 있음에도 보지 않는 두려움이 문제인지.

두려움에 눈이 먼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본능과 욕구였다. 그리고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들이 행사하는 폭력은 마치 원래 그랬었던 것처럼 매우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폭력이 자연스러우면서도 항상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잊기 위해 또다시 본능만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지속적인 두려움의 고리가, 인간들을 악순환의 늪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본능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의 것이라고 불리기에는 부끄러울 만큼 짐승의 것과 비슷했다. 과연 이자들은 눈이 먼 것이 문제일까? 혹은 두려움이 인간임을 멀게 한것인가?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이 지옥에서, 우리 스스로 지옥 가운데도 가장 지독한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이곳에서, 수치심이라는 것이 지금도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하이에나의 굴로 찾아가 그를 죽일 용기를 가졌던 사람 덕분이기 때문이오. … 늘 수치심이 없어 배를 채울 수 있었던 자들이 있었소, 하지만 우리는 우리 분수에 맞지 않은 마지막 한 조각의 존엄성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소, 이제 우리에게도 마땅히 우리 것이어야 하는 것을 찾기 위해 싸울 능력 정도는 있다는 것을 보여줍시다.” 275쪽]

책 속에서,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았던 ‘의사의 아내’는 아비규환이 된 지옥속에서 스스로 보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눈먼자들과 별 다를바 없이 생활한다. 그러나. 눈이 멀기로 결심했던 상황속에서도 차마 눈뜨고는 못보겠는, 참을 수 없는 상황들이 그녀를 괴롭힌다. 인간과 짐승의 경계에서, 정확히 그 경계선을 밟고 선 상황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수치심이라는 것이 그녀를 행동하게 만든다. 지음에서는 수치심을 만들어 내는 것의 차이가 인간과 짐승의 차이일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눈먼 사람에게 말하라, 너는 자유다. 그와 세계를 갈라놓던 문을 열어주고, 우리는 그에게 다시 한 번 말한다, 가라, 너는 자유다. 그러나 그는 가지 않는다. 그는 길 한가운데서 꼼짝도 않고 그대로 있다. 그와 다른 사람들은 겁에 질려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그들은 정신병원이라고 정의된 곳에서 살았다.” 305쪽]

신병원이라는 곳의 가장 큰 특징은 구별이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별함으로서 인간이 인간에게 행할 수 있는 폭력을 정당화 하고, 그로 인해 만들어진 폭력적인 구조는 인간이 그곳을 벗어나는 선택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정신병원이라는 폭력의 구조는, 그 구조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구조 밖에 있는 사람들 또한 정상이라는 범주 아래서 행동하도록 강요받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사회구조는 우리가 모두 ‘어쩔수 없는 선택’을 하도록 강요받고, 그렇게 만들어진 사회는 다양성과, 인간다움이 존재하지 않는 ‘눈먼 자들의 도시’가 되어간다.

[“이윽고 작가가 말했다, 자기 자신을 잃지 마시오, 자기 자신이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지 마시오.” 414쪽]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461쪽]

[“우리 눈을 뜹시다. 못해, 우리는 눈이 멀었어, 의사가 말했다. 가장 심하게 눈이 먼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은 위대한 진리예요. 나는 보고싶어요,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가 말했다. 하지만 그 마음만 가지고 눈을 뜰 수는 없습니다, 유일한 차이는 아가씨는 이제 가장 심하게 눈이 먼 사람이 아니라는 거지요,” 419쪽]

눈먼자들의 도시는 단순히 눈이 멀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사회가 아니다. 보고있지만 보지 않는사람. 보고싶지 않아 피하는 사람. 눈이 멀게 된 것이 나의 탓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며, 자신의 선택을 외부의 책임으로 돌리는 사람 모두에게 폭력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폭력에 비해 인간에게 인간다움은 자연스럽지 않다. 눈이 먼 자들이 다시 눈을 뜨게 되는 것이 힘든 일인 것처럼 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다움은 내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아픔의 진실을 마주하고, 피하지 않으며,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음을 매 순간 고민하는 것이라고 지음에서는 이야기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인간의 본질적인 고민이며, 아픔과 병존한다고 생각했다. 진실과 아픔은 함께 간다. 그러기에 인간다움의 탐구는 고통에서 시작된다고 이야기하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에게 고통이란 자연스러울 수 없다. 아프기 때문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고통을 느끼고, 아프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눈물 흘리는 것이 인간이지만, 때로 인간은 아프지 않고 싶기에 고통을 회피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순간, 고통은 지속되며, 쌓인다. 쌓이는 고통은 볼 수 있지만 볼 수 없게 만들고, 이 과정에서 인간다움은 실종된다. 눈이 머는 것이다.

[“아픈 기억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는 법입니다. 그것과 정면으로 부딪쳐 돌파해 나가기 전까지는.” - 토니 모리슨]

고통을 느낄 수 있기에 인간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아프지만 희망적이었다. 따라서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에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인간이기에 주어진 고통을 잘 마주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순간에서 우리는 인간다움을 찾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어느때보다 인간다움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