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심은 사람> - 장 지오노

<월든>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난 4개월동안의 청년기후포럼은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고민을 해왔습니다. 「미래의 지구」를 통해 더 나은 세상은 없을까를 상상해보고, 「우리가 알던 세계의 종말」을 통해 나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인식하고 더 많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지구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임을 고민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문명」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간직하고자 하는 사랑, 유머, 예술의 가치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역사성을 기억하고 잊지 않아야 하는 다른 가치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피스오브피스는 “우리가 포럼을 해오면서 가장 많이 나누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환경이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기후변화는 무엇의 위기일까?” 라는 질문들로 포럼을 채워왔습니다.

여러 환경단체에서 이야기하는 기후위기와 자연의 위기, 환경변화와 자연재해로 인한 우리의 삶의 위기들을 조명하는 것을 보며 우리는 무엇이 위기일지 궁금했고 환경과 나의 관계에 대해 청년의 시각으로 접근해 보고자 했습니다.

다양한 책들을 마주하며 나눈 우리의 기후이야기는 기존의 것들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환경의 위기가 곧 나의 삶의 위기라는 이야기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많은 위기를 의미했습니다. 기후위기는 단순히 지구의 멸종, 터전의 상실, 육체적 고통이라기보다 “상상력의 부재”, “무력함과 주체성의 상실” “문명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 위기로 다가왔습니다. 나의 삶이 무너진다기보다 인간으로서, 지구에서 살아가는 인류의 문명이 상실될 수 있는 실존의 위협이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포럼, 장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과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은 무너지고 있는 인간과 지구와의 관계성을 간절히도 지키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담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지키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람은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 속에서 자연과 교감하며 살아갈 때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나무를 심은 사람, p.54)

요컨대 경험과 신념에 비추어 소박하고 현명하게 산다면 이 땅에서 자기 한 목숨 유지하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오락이라고 확신한다. 더 소박하게 사는 민족의 일상적인 노동은 더 인위적인 생활을 하는 민족에게는 기분 전환을 위한 스포츠와 같을 것이다. 나보다 더 쉽게 땀을 흘리는 사람이 아닌 한 굳이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도록 일하면서 생계를 꾸려 나갈 필요는 없으리라. (월든, p.105)

자연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부피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섬세하게 도토리를 고르고, 나무를 심습니다. 그의 행동에는 환경을 보호한다든지, 건강한 공기를 위해서라든지, 어떠한 목적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소로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떠나 월든 숲속으로 들어간 그는 위대한 자연의 영혼과 때로는 교감하며, 때로는 압도되며 살아갑니다.

한 인간이 참으로 보기 드문 인격을 갖고 있는가를 발견해내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 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만 한다. 그의 행동이 온갖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고 그 행동을 이끌어 나가는 생각이 더없이 고결하며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런데도 이 세상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한 잊을 수 없는 인격과 마주하는 셈이 된다. (나무를 심은 사람, p.11)

하루를 자연처럼 살아 보자. 철로 위에 떨어진 견과류 껍데기나 모기 날개 탓에 탈선하는 기차처럼 되지는 말자. 아침 일찍 일어나고 식사를 하든 거르든 조용하고 평온하게 지내자. 손님이 오든 종이 울리든 아이들이 하성을 지르든 상관하지 말고 하루하루 즐겁게 살기로 하자.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서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월든, p.145)

그들의 삶에는 수단화된 목적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그들은 나를 중심으로 만들어줄 환경을 위해 살지 않고 나만을 위한 세계를 구성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냉철하고 묵묵히 다른 세계를 바라봅니다.

내가 보기에 사람들 대부분은 인생이 악마의 것인지 신의 것인지에 대해 이상할 만큼 확신을 갖지 못한 채 이승에서 사는 주된 목적은 “신을 찬양하고, 그 존재를 영원히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다소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다. (월든, p.135)

진정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소로우와 부피에는 모두 자연과 인간이 나누어질수도, 누군가 누구를 지배하지도 않는 일치의 관계임을 이야기합니다.

이 모든 것이 오로지 아무런 기술적인 장비도 지니지 못한 한 인간의 손과 영혼에서 나온 것임을 기억할 때마다 나는 인간이란 파괴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는 하느님처럼 유능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나무를 심은 사람, p.42)

내게는 사랑보다, 돈보다, 명예보다 진실이 필요하다. 언젠가 각종 먹음직스러운 음식과 향기로운 와인이 풍성하게 차려진 식탁 앞에 앉은 적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 아부하는 말만 오갈 뿐 성실함과 진실함은 없었다. 결국 나는 쫄쫄 굶은 채 황량한 식탁을 떠났다. (월든, p.474-475)

환경보호와 기후위기, 자연이라는 관계를 또 다시 나와 내 주변의 이야기로 두는 도돌이표 같은 이야기는 우리가 마주했던 기후포럼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지난 4개월동안 우리는 기후위기가 나의 위기인 이유에 대해, 지구에서 존재하는 인간은 지구의 역사와 같은 운명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세계에 전부를 던졌던 두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거짓된 인간 사회……
세속적 위대함을 좇느라
천상의 온갖 즐거움이 허공에 흩어지는구나. (월든, p.51)

내가 숲으로 들어간 것은 나 자신이 의도한 대로 삶의 본질적인 사실만을 앞에 두고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인생의 가르침을 온전히 익힐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고, 죽음을 맞았을 때 내가 헛되이 살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싶어서였다. 나는 삶이 너무 소중하여 삶이 아닌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결코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한 순간이라도 깊이 있게 살면서 삶의 정수를 고스란히 흡수하고 싶었다. (월든, p.135)

단순히 육체적 정신적 힘만을 갖춘 한 사람이 홀로 황무지에서 이런 가나안 땅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면 나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조건이란 참으로 경탄할 만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곤 한다. 그리고 그런 결과를 얻기 위해 가져야만 했던 위대한 영혼 속의 끈질김과 고결한 인격 속의 열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신에게나 어울릴 이런 일을 훌륭하게 이루어낼 줄 알았던 그 소박한 늙은 농부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품게 된다. (나무를 심은 사람, p.68-69)

자신이 사랑하는 세계에 모든 것을 던졌던 두 이야기는 인간의 ‘세계성’에 대해 고민해 보게 되는 지점입니다. 되냐 안되냐, 하냐 안 하냐의 이분법적 구조를 벗어나 자연 속의 나를 인식하고, 내 안의 자연을 인식하는 것. 그것을 이루어낼 수 있는 존재 또한 인간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마침내 넓은 세계의 지평선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무한히 확장하는 인간의 존재의 가능성이자, 모든 곳으로 뻗어나가는 삶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인간은 자연과 깊은 관계 속에서 고유한 세계성을 지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우리는 어쩌면 모든 것과 무한히 연결되어 있지는 않을까요?

<활동>

1. 소로우의 일기처럼, 오늘의 내가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상상을 하며 오늘의 일기를 써봅시다.

2. 내가 세계와 연결되어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나요? 나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무엇일까요?

3. 환경보호는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까요? 기후위기는 나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