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

우리는 지난 포럼에서 탈진실을 정보과잉 등 기술적 발전의 차원과 이에 접근하는 주체의 정보편향 혹은 인지편향의 문제, 포스트모더니즘이 미친 영향을 파악했다. 포스트 트루스의 ‘truth’가 진리와 진실이 혼재된 개념으로 객관성, 절대성, 과학적 사실, 근거 ,참, 거짓 등 ‘truth’에 대한 논의를 하였고, 궁극적으로 진리와 진실을 분리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탈진실 시대는 단순히 감성이 이성보다 여론을 형성하기 쉽고 진실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도 문제임을 인식했다.

<포스트 모더니즘과 탈진실>

지난 포럼에서 리 매킨타이어(Lee Mclntyre, 이하 매킨타이어)는 정보편향, 인지편향의 문제외에도 탈진실이 발생하는 원인 중 하나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을 지적했다. 특히 텍스트의 해체를 주장하는 이론들을 논하면서 저자의 의도와 의미에 대한 회의주의적 논점들이 야기한 탈진실의 관점에 주목했다.

그러나 매킨타이어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사유와 철학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 방식과 언어 기술의 방식에 대해 지적했다. 즉,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사유 능력이 약화된 현대인의 문제를 포스트모더니스트의 몫이라 여겨 그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일방적이고 과도한 판단일 수 있으며, 탈진실 현상에 대한 사유를 막는 장애물일 수 있다. 서양 철학이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이르는 전체의 역사를 되짚을 수는 없기에 이 문제를 전략적으로 간명하게 정리하고 구분할 확인할 필요하다.

서양철학이 진리를 전복해온 전통은 진실의 부재와는 다르다. 철학에서 보여주는 회의주의적 태도는 다음 세 가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고 본다.

철학이 회의주의의 방식을 선택했던 이유는 첫째, 철학에서 확보하려 했던 객관적 지식에 대한 열망은 진리를 찾기 위한 지속적이고 절차적인 방법적 과정이었다. 둘째, 철학에서 진리의 독점. 진리주의(the regime of truth)를 배격하려 했던 이유는 독점적 권한과 권위를 부수려는 시도였다. 셋째, 과학적 사실과 과학은 다르며, 과학이 개입하여 유통시키고 있는 현재의 정보들은 철학적 진리 게임과는 무관하다는 점이다.

이 세 가지 논점에 기반하여 철학에서 해왔던 진실전복의 행위는 현재 발생하는 정보의 유통과 순환의 구조와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철학적 진실전복의 행위와 탈진실 현상은 목적과 방법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 철학에서 세웠던 진리의 탑이 스스로 논리적 개연의 고리들이 가진 견고함, 그 자체로 일종의 권위를 낳고 그것이 반대쪽 진리를 닫아버릴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될 때, 다른 진영의 학자들이 그에 맞서는 견고함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드는 양상을 시도했던 것이 탈진리(脫眞理)의 역사였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탈진실이 아닌 탈진리를 위한 철학적 진실전복의 행위였음을 이해하고 넘어가려 한다.

왜 이렇게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한 번 다뤘느냐. 오늘 책의 저자가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철학자 미셸 푸코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난 포럼을 준비한 이후, 평화포럼에서도 그렇고 내가 생각해보는 많은 문제의 원인으로 계속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떠올리는 것 같아 나름대로 포스트모더니즘과 탈진실 현상을 조금은 분리하고자 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푸코는 오래전부터 ‘진실을 말할 의무’라는 문제를 연구해 왔다.

나는 꽤 오래전부터 ‘진실을 말할 의무’라는 문제를 연구해 왔다. 의학적 실천과 정신의학적 실천 속에서, 19세기 초부터 정신의학의 거대한 의식 내부에 자기 자신에 관한 진실을 말할 의무가 침투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법적 실천 혹은 형사적 실천, 성 현상의 문제(특히 그리스도교 내부에서의 욕망과 육욕의 문제)와 관련해서도 이 문제와 마주쳤다.

자기 자신에 관한 진실을 현시할 의무는 ‘속죄 의식’에 속했다. 옷차림, 단식, 시련, 공동체로부터의 추방, 교회 문 앞에서 애원하는 태도 등을 통해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극화하는 행위 등을 이에 해당한다. 반면, 이 속죄 의식과 다른 실천이 모든 수련수사 및 수사들에게 부과되었다. 수사는 지도자에게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자기 사유의 모든 운동들, 자기의 욕망이나 색욕의 모든 움직임을 털어놓아야 했다. 이것은 매우 특이한 의무라 할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죄의 고백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말할 의무이지 ‘모든 것’을 말해야 할 의무는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말해야 하는 이 의무는 4~5세기 그리스도교 영성에서도 매우 특이한 것이었다. 이 의무는 16~17세기에 꽃피우게 되는 의식 지도 내에서 다시 재발견된다.

바로 이 ‘모두 말하기’의 역사, 자기 사유의 움직임을 모두 말할 의무라는 것이 나를 사로잡았다. 이것은 어디서부터 왔을까? 나는 이 ‘모든 것을 말할 의무’의 실천 토대를 그리스-로마 철학에서 재발견해 보려 했다.”

제가 파레시아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첫째, 파레시아의 역할을 연구하려 하는데, 자기수양이 파레시아스트 게임이라는 특수한 진실 게임을 이용해 전개된 방식으로 연구해보고자 합니다.

둘째, 고대 문화에서의 파레시아의 역사를 통해 오늘날 우리 사회 내에서 비판적 태도라 불릴 수 있는 것의 기원과 계보를 분석해보고자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그것이 철학적 관점이 됐든 정치적 관점이 됐든 종교적 관점이 됐든 간에 비판의 역할, 비판적 태도는 고대 그리스 철학이 발견하고 창안한 파레시아스트 역할에 기인합니다. 주체화의 계보와 비판적 태도의 계보와의 교차 지점에 있는 파레시아의 분석은 우리 자신에 대한 역사적 존재론이라 불릴 수 있는 것에 속합니다.

‘포스트-트루스’에 “거짓이 판치는 시대에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곧 혁명이다”라는 조지오웰의 말이 적혀 있습니다. 푸코 역시 진실을 말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인간 존재로서 우리는 진실을 말할 능력이 있고,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의 습관과 태도,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능력이 있고, 진실을 말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이 파레시아에 관한 이번 강의의 일반적 범주입니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모든 것을 말하기’ - 파레시아>

“파레시아는 ‘모든 것을 말하기’를 의미하는 그리스어다. 모든 것을 말하기는 아무것이나 다, 선별도 하지 않고 신중을 기하지도 않으며 거리낌 없이 말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비겁하거나 수치스러워서 즉각적으로 입 밖에 내지 못하는 것을 과감히 털어놓는 뜻이기도 하다”

파레시아 개념은 민주주의와 진실 간의 관계를 재평가 할 수 있는 중요한 정치적 가치를 지니며, 주체와 진실 간의 관계를 문제화하는 데 결정적인 윤리적 가치를 지니고, 비판적 태도의 계보를 기술하기 위한 철학적 가치를 갖는다. 파레시아는 개인의 덕이나 수사학적 기술이기보다는 일정한 발언의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다. 푸코는 담론의 화용론이라는 틀 내에서 파레시아 개념을 구축한다. 분명 언제나 중요한 것은 주체에게 진실의 능력이 있는지 여부를 아는 것이지만, 진실을 정확하게 사유할 수 있는지를 문제시하기보다는, 타인들 앞에서 그 진실을 말할 수 있는지 여부를 문제시하는 그런 진실의 능력이 주체에게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푸코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주체가 진실과 맺는 윤리적 관계에 관한 문제다.

파레시아의 윤리적 관점, 주체와 진실 간의 관계

파레시아는 말하는 사람(주체)과 그가 말하는 것(진실) 사이의 일정한 관계를 지시한다. 파레시아 내에서 말과 담론은 화자 자신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모든 것을 완벽하고 정확하게 설명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 결과 청중은 화자가 생각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되며, 발언 행위를 통한 신념과 진실의 일치를 중요시 한다.

또한 파레시아는 위험에 맞서는 용기다. 파레시아 내에는 신념과 진실의 일치관계, 주체와 진실의 관계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 진실을 말할 때는 위험이 수반됩니다. 파레시아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파레시아 내에서 진실 말하기는 그 극단의 형식에서는 삶과 죽음의 게임에 속한다.

그러나 파레시아가 모든 종류의 위험과 연관되는 것은 아니다. 파레시아의 기능은 누군가에게 진실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파레시아는 늘 화자 자신에 대한 비판이나 대화 상대자에 대한 비판이라는 비판적 기능을 갖는다. 파레시아는 자아비판일 수도 있고 타자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지만, 늘 화자는 대화 상대자에 비해 열등한 위치에 놓인다. 언제나 아래로부터 위를 향합니다. 파레시아는 진솔성, 진실과의 관계, 신념과 진실의 일치를 전제로 하며, 위험과 비판을 전제로 하고, 화자가 대화 상대자에 비해 열등한 위치에 놓이는 상황 내에서의 비판 행위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파레시아는 자유이며 동시에 의무다. 파레시아는 일종의 발언 행위이며, 그 속에서 화자는 솔직함을 통해 진실과 일정한 관계를 설정하고, 위험을 통해 자신의 삶과 일정한 관계를 수립하며, 자유 및 의무를 통해 법과 일정한 관계를 수립하고, 자아비판이나 타자에 대한 비판 등 비판을 통해 타자와 일정한 관계를 수립한다. 파레시아 내에서 화자는 자유를 활용하고, 거짓 대신 진실을 선택하며, 생명과 안전보다는 죽음을 선택하고, 아첨 대신 비판을 택하며, 이득이나 이기심 대신 의무를 택한다.

실제로 먼저 ≪히폴뤼토스≫421행 이하에서는 파레시아를 시민의 자유이자 권리로 본다. 파레시아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노예의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이다.

플라톤의 ≪법률≫에서는 절제된 군대식 군주제(키루스 왕의 정치체제)를 다루면서 두 가지 점을 지적한다. 군주정에서 병사들은 군의 지휘에 부분적으로 참여했고, 왕 자신이 자기 주변에서 자신에게 솔직하게 말해 줄 능력을 가진 자들에게 파레시아를 행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여기서 파레시아는 일종의 자유, 군주나 부유한 자나 강자가 동의하고 양도한 자유가 된다. 이 자유는, 군주가 훌륭한 군주가 되기 위해 반드시 동의해야 하는 자유다. 파레시아는 훌륭한 군주의 기준이고, 탁월한 통치의 기준이다. 결국 파레시아는 사적 권력 행사 및 매우 강력한 불평등 구조와 결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자유는 권력의 위임이나 권력에의 참여와 관련된 자유가 아니다. 군주는 타인에게 ‘군주 자신의 영혼에 권력을 행사할 자유’를 준다. 정치적 파레시아가 행사되는 지점은 정치적 행위 영역이 아니라 군주의 영혼이다. 이러한 파레시아는 특정 유형의 정치 구조, 궁정의 정치적 형식과도 연결되어 있는데, 이와 관련해 18세기까지 유럽에서 군주에게 충언하기 위한 발언의 자유라는 문제가 정치적 문제였다.

또 플라톤의 ≪법률≫에서는 ‘도덕의 스승’의 필요성도 언급된다. 도덕의 스승은 파레시아를 통해 다른 모든 사람을 제압하는 사람, 무엇이 폴리테이아(정치체제)에 부합하고 무엇이 헌법에 부합하는지를 만인에게 지시하는 사람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 외에도 에피쿠로스주의의  ‘상호 고백’이라 부를 수 있는 우정으로서의 파레시아, 견유주의의  비판적 설교. 파문을 일으키는 행동. 도발적인 대화등 의 파레시아 형태도 있다

그런데, 진정한 파레시아스트를 어떻게 알아볼 것인가?

플루타르코스는 ‘진짜로 위험한 아첨꾼’은 파레시아스트와 가장 닮아 있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파레시아스트처럼 타인에게 가혹한 것, 불쾌한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아첨꾼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플루타르코스는 다음 기준을 제시한다. 실존의 선택, 근본적 의지 등등의 범주에서 파레시아스트를 찾는 주체의 프로아이레시스(유사)와 파레시아스트 자신의 프로아이레시스 간의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

둘째, 파레시아스트는 언제나 동일한 것에 기뻐해야 하고, 동일한 것에 동의해야 한다. 호불호 체계, 판단 체계가 영속적이어야 한다. 셋째, 파레시아스트는 유일하고 동일한 파라데이그마(원형, 모델)를 향해 자신의 삶을 관리해야 한다.

진정한 파레시아스트는 자기 고유의 파토스를 가진 자, 동일한 삶의 규칙을 가진 자, 언제나 동일한 삶, 말, 섭생, 식이요법, 식사법을 가진 자다. 그렇기 때문에 파레시아스트는 그러한 것들을 추구하는 자, 즉 자기 실존의 통일성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발견하려는 자에게 고정점으로 사용될 수 있다.

진실과 사회 간의 관계와 관련된 문제는 이데올로기를 통한 사회와 진실 간의 관계문제가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자라 불리는 자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오늘날 탈진실 시대 역시 이데올로기를 통한 사회와 진실 간의 관계 문제라기 보다는 ‘진실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자’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오늘날, 각자가 권력을 행사하고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권한을 평등하게 갖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제도적 체제의 장에서 누가 진실을 말할 능력이 있는지를 아는 문제라고 할 수 있죠. 진실, 민주주의 그리고 교육 바로 이것들이 파레시아 위기의 주요 특징들입니다.

오늘날 한 사회에서 누가 진실을 말할 자격이 있는지, 누구의 말이 진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요?

“우리 사회에 진실을 말하는 자에게 네 가지 역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고 푸코는 말합니다.

예언자, 현자, 교육자 그리고 파레시아스트입니다. 예언자는 신의 대리인이지만 파레시아스트는 자기 자신의 대변인입니다. 현자는 침묵할 수 있지만 파레시아스트에게는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교육자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육자는 사회 내부에 존재하지만 파레시아스트는 분쟁적 상황 속에 위치합니다. 그는 권력과 맞서고, 다수의 사람들이나 여론 등과 대립합니다. 파레시아스트는 통합의 역군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해체의 역군으로 활동합니다.

이 네 역할은 섞여왔습니다. 소크라테스와 루소는 현자이자 파레시아스트였고 에픽테토스는 교육자이자, 견유주의자로서 도발적 파레시아스트이기도 했습니다. 19세기 독일의 대학에서 칸트는 파레시아스트의 역할과 교육자 역할을 다시 한 번 결합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르낭, 러셀도 한 예입니다.

우리 사회에 파레시아란 말은 존재하지 않지만 비판하는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역할과 관련해 종교, 대학(학자), 전문가, 시민단체, 언론 등이 있습니다.

오늘날 비판의 역할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요.

우리가 지난 시간, 오늘날 탈진실 시대의 원인으로 꼽았던 것 중 하나로 진실에 대한 태도와 교육을 얘기했습니다. 오늘날의 위기와 푸코가 얘기하는 파레시아의 위기, 진실의 문제는 동일하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 위기를 해결할 방법은 무엇일까요?

소크라테스는 개인적이고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파레시아의 양상을 확인하는 파레시아 실천의 중요한 참고대상이 될 수 있다.

니키아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결국 지금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해명하고 어떻게 지난 삶을 살았는지 자신에 관해 해명하는 상황에 걸려들 때까지, 이것들을 모두 훌륭하게 잘 시험해보기 전까지” 대화 상대자를 놓아주지 않는다.

이렇게 소크라테스의 파레시아 게임은 정치적 영역과 정치적 무대에서 우리가 마주쳤던 파레시아 게임과 대단히 다르며 개인과 개인의 대면 관계를 전제하는 파레시아 게임을 행한다.

이 게임은 소크라테스와 그의 대화 상대자들 간의 친밀성과 서로 간의 상호 접촉을 전제로 한다. 두 사람이 관계를 맺고 친밀감을 형성하면서 소크라테스의 담론에 상대는 이끌리게 된다. 정치적인 파레시아 게임에서는 수동성이, 청중으로 하여금 그가 듣는 바에 의해 설득당하도록 하는 반면, 소크라테스의 파레시아 게임에서 대화 상대자는 소크라테스의 로고스에 의해 이끌린다. 그런데 그는 무엇으로 이끌리는 것일까? 요컨대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설명하는 단계로 이끌린다. 그 결과 소크라테스의 로고스는 청자를 이끌어가는 로고스, 청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삶을 설명하도록 유도하는 로고스, 청자 자신의 삶에 로고스를 부여하도록 유도하는 로고스이다. 그러면 청자는 어떻게 자기 자신의 삶에 로고스를 부여하는 것일까?

청자는 자기 자신의 삶을 설명한다. 설명한다는 것은 기독교적 고백과 같은 것이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비오스(삶)에 대해 물음을 던질 때 그는 어떤 이야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조직하고 삶에 형태를 부여하는 합리적 담론, 그것을 통해 어떤 사람이 자신이 행하는 바와 행한 바를 정당화할 수 있는 합리적 담론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삶을 설명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합리적 담론인 로고스와 자신이 사는 방식 간에 관계가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할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탐색은 인생의 사건들에 골몰하는 것이 아니라 삶, 삶의 양식으로서의 비오스와 로고스 간의 관계에 골몰한다. 그것은 삶에 트로포스(형태)를 부여하는 바에 관한 탐색이다. 바사노스 즉 시금석으로서의 소크라테스의 역할은 로고스와 비오스가 맺는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정확히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파레시아 게임과 그 시험에 힘입어 사람들은 로고스와 비오스 간의 관계, 자신의 삶과 합리적 원리 간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분별하게 되고,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게 되거나 배우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 이러한 마테시스와 파레시아의 관계는 청년에서 장년에 이르기까지 뭔가를 배우려는 항상적 태도, 항상적 의지의 형태를 갖게 된다.

그런데, 푸코는 파레시아라는 개념이 근대 이후 더는 작동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그가 파레시아의 개념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는 무엇일까? 이 문제가 푸코가 논하는 진실과 탈진실의 문제를 해소하는 방안에 도달하는 지름길일 것이다.

이제 다시 리 매킨타이어의 <포스트 트루스>와 미셸 푸코의 <담론과 진실>을 연결지어 생각해볼까요?

김분선.(2020).‘탈진실’과 배려 주체의 거리두기 - 푸코의 진실과 저항의 문제를 중심으로 -.현상학과 현대철학,87(),71-91. 이 논문은 결론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탈진실 현상으로 다시 돌아가서 탈진실 현상의 핵심이 객관적 사실을 거부하고 객관적 사실이 대중의 의견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하는 환경이라는 정의를 다시 생각해볼 때, 이를 객관적 사실을 신뢰할 수 없는 환경에 대한 대중들의 저항적 움직임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오히려 탈진실의 환경은 객관적 지식에 대한 해체를 빌미로 과학정보 시대의 환경에 떠밀려 주체적 판단이나 행위를 상실한 것의 표명하는 것은 아닐까?

또 자체적으로 규합하여 생산한 지식을 낮은 증거주의에 기반하여 엄밀하고 올바른 지식의 방향을 와해하는 것은 아닐까?

또 이들이 논하는 푸코의 해체주의적 방식의 잔재로 탈진실이 등장한 것이라고 한다면 푸코가 구조 해체주의를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이 단지 객관적 지식의 해체와 지식 권력 체계의 와해에 지나지 않았을까?

소크라테스의 파레시아 게임을 통해 개인이 깨닫는 것처럼, 파레시아스트가 된다는 것은 내 사고 체계와 삶의 관계, 자신의 삶과 합리적 원리 간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분별하게 되고,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게 되거나 배우려고 노력하게 되는 삶의 태도를 결정하고 이제 이러한 마테시스와 파레시아의 관계는 청년에서 장년에 이르기까지 뭔가를 배우려는 항상적 태도, 항상적 의지의 형태를 통해 위험을 감수하고 파레시아를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다시 돌아와, 우리 공동체는 서로에게 파레시아를 할 수 있는가?

또 나는 파레시아가 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