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매킨타이어

“반박 시 님 말이 다 맞음”

이 문장은 자신의 의견에 반박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가정했으며, 그 사람과의 논쟁을 피하기 위해 상대방의 말이 진실이라고 미리 선언해버립니다. 정말 상대방의 말이 맞아서 인정하는 것일까요?

1. 탈진실 현상이 무엇?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2016년 올해의 단어 ‘post-truth(탈진실)’ 선정했다. p15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는 포스트트루스를 “여론을 형성할 때 객관적인 사실보다 개인적인 신념과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p19

“오늘날 ‘사실’과 ‘거짓’의 경계는 모호해졌고 사람들은 추측을 내놓지만 입증의 책임을 지지는 않고 있다.p16

탈진실이 나타나는 양상이 다양하다는 점을 이해하면서 각각 어떤 차이가 있는지 분명히 밝히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진실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종류의 탈진실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식회피, 거짓말, 이기심, 무관심, 정치기술, 자기기만 등 각각의 양상을 설명하는 일은 그리 까다로운 부분이 아니다. 이미 여러 세기 전부터 목격해온 현상들이기 때문이다.

탈진실 시대에 새롭게 나타난 중요한 문제는 현실을 파악할 수 있는지는 물론 애초에 현실 자체가 존재하는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p26)

어느 시대나 진실을 숨기는 자 거짓을 일삼는 자들은 존재했다. 실제로 여러 세기 전부터 인식회피, 거짓말, 이기심, 무관심, 정치기술, 자기기만 등 각각의 양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현재 탈진실의 중요한 문제는 단순히 여론을 형성하는데 유리한 것을 넘어서 ‘현실’을 파악할 수 있는지, 현실 자체가 존재하는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라고 설명한다.

그 배경으로 책에서는 현대 철학에서 인기를 얻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데리다의 해체주의 이론을 언급한다.

“해체주의 이론에 따르면, 글쓴이 자신조차 텍스트를 통해 무엇을 의도하고자 했는지 모를 수 있기 때문에 비평가는 텍스트를 조각조각 해체한 뒤 이면에 숨어 있는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전제들에 비추어 텍스트를 검토해야 한다.(168)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학자들을 비롯한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해체주의 이론을 받아들어 여러 ‘텍스트’에 이론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행위자 본인은 모른다고 할지라도 사실상 모든 인간 행동에 나름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점에서 세상에 텍스트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169)

이때부터 ‘텍스트가 의미하는 바에 정답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진실 개념 자체도 의심받기 시작했다.(169)

결국 단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여러 해답이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접근법이란 모든 것을 이ㅡ심하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어디에도 ‘정답’은 없으며 각자의 ‘이야기’만 존재할 뿐이다.(169)

절대적 진리, 객관적 진리가 철학에서 만들어낸 허구라고 생각한ㄴ 순간 유일한 대안은 ‘관점주의’밖에 남지 않는다. 관점주의란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에 객관적인 정답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보는 관점에 따라 세상이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이다.(169-170)

‘객관적인 진실’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첫 번째 논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러한 생각이 옳다면 우리는 누군가 참인 말을 할 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것일까?

두 번째 논지

누군가 어떤 진실을 제시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의 ‘정치적 이념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미셸 푸코는 인간의 사회 생활이 언어에 의해 규정되지만 언어 자체는 권력과 지배 논리로 가득 차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지식을 주장하는 모든 행위는 근본적으로 권위를 행사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직접적으로 보수 진영의 이념을 지지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오늘날 탈진실 세계에 기여해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포스트모더니즘 특유의 모호함에 숨어 책임을 회피하다가 자신들조차 받아들이기 힘든 목적에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자연과학을 겨냥했다.

<과학부인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들은 먼저 ‘과학’을 부인했습니다. 과학자들의, 학계에서 내린 결론이 자신들의 이념과 상충되기 때문에 과학적 연구 방식의 정당성을 부정하기 시작했습니다.

2. 과학부인주의

지난 수십 년간 과학계가 겪어온 일은 탈진실 현상의 예고편과 같았다. 방법론 면에서 권위를 인정받았던 과학 연구는 이제 연구 결과에 동의하지 않는 수많은 비전문가들로부터 공공연한 의심을 받고 있다. 과학자 자신들도 늘 서로의 연구를 면밀히 검토하며 의심하지만 비전문가들이 제기하는 의혹은 그와는 성격이 다르다.(35p)

특정 연구 결과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흔히 펼치는 논리 중 하나는 연구자들이 편향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신념이 실증적인 탐구 과정에 악영향을 미치는지 않았는지 주의를 기울인다는 점에서 높은 과학적 표준을 존중하는 태도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37P)

자신만의 이념적인 잣대를 객관적인 탐구 과정에 들이민다. 과학의 공정성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키고 실증적인 탐구 방식이 가치중립적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려는 것이다. (37)

대중에게 의심을 퍼뜨리고 나면 사람들이 ‘다른 가능성’을 고려하도록 만드는 데에는 그리 많은 노력이 들어가지 않는다. 어차피 ‘모든’ 과학 이론이 편향될 수밖에 없다고 의심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주관적인 이념이 뒤섞인 이론이라고 해서 배제해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37)

과학을 부정하는 사람에게도 “당신의 증거는 어디 있나요?”라고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처럼 엄격한 기준을 들이댈 때마다 과학부인주의자들은 늘 흐지부지 대답을 회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작동하는 원리를 전혀 도는 거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진화를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엄밀히 따지면 지구가 둥글다는 명제조차 증명할 수 없다)이 과학의 심각한 결함이라고 착각하면서 대안 이론을 꺼내 들 준비를 한다.(39)

과학부인주의는 경제적인 이유나 이념적인 이유 때문에 발생한다. 일반적으로는 가진 것을 잃기 싫어하는 자들이 처음 의혹을 던지면 역정보(misinformation(고의적으로 유포된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는데 혈안이 된 정치꾼들이 바통을 이어받는 식이다. 경제적 이해관계와 탈진실적 정치관 사이의 연관성은 아리 레이빈하트의 <거짓말 주식회사> 에서도 깊이 다뤄진다. 여기에는 기후변화 총기 규제, 이주 정책, 의료보험, 국가 부채, 선거 개혁, 낙태, 동성 결혼 등 다양한 영역에서 오늘날과 같은 정치 구도가 만들어지기 가지의 기업의 로비 활동이 얼마나 영향을 미쳐 왔는지 설명한다.(40)

사실 과학계는 과학부인주의자들을 별로 신경쓰지 않았을 것 입니다. 과학부인주의자의 주장은 과학계에서는 수용을 고려할 여지도 없는 헛소리에 불과했으며, 자신들의 인프라(과학계)에서 전혀 영향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중들에게는 아니었습니다. 과학부인주의자들은 과학계의 폐쇄적인 인프라를 파악하고 이용한 것일까요? 이제 이 과학부인주의자들은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대중을 포섭하려 합니다. 마침 언론이 객관성, 중립성에 대한 문제 제기를 받고 있었습니다.

전통적인 미디어들은 이 사실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이제부터 정말로 ‘공정하고 균형 잡힌 보도’가 무엇인지 보여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어떤 논점을 다루더라도 양쪽 입장을 모두 보도하기 시작했다...... (109)

그 결과 아이러니하게도 보도의 객관성이 높아지기는커녕 정확한 뉴스보도에 집중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각 당의 지지자들이 필사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려고 하는 상황 속에서 실제로 자기 불만을 토로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마련해버리면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저널리즘의 높은 표준은 더욱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통적인 언론은 이를 감수하고자 했다. 언론이 객관성에 집착한 결과, 사실 문제를 전달할 때조차 모든 입장에 ‘균등한 시간’을 배정하고 양쪽 이야기 모두를 공평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만약 찬반 의견이 갈리는 주제였다면 이러한 태도가 합리적이라거나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문제를 전달하는 보도에서는 재앙과도 같았다. 언론은 실제로는 믿을 만한 양쪽 입장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을 대도 ‘동일 시간 배분’의 원칙을 따르느라 양쪽 입장 사이에서 ‘기계적 중립성’을 지키게 되었다.

언론은 자신들이 편향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두느라 정작 ‘진실을 전달하는 일’은 도외시하고 있었다. 조작된 의혹을 가지고 진실에 대한 혼란을 퍼뜨리고자 했던 자들의 손에 제대로 놀아난 것이다. (114)

객관성은 뉴스 보도가 게을러질 구실을 제공한다. 마감 시간이 다가오는데 ‘양쪽의 입장 전달’까지 조사해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최신 기사’에만 집착하느라,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이야기를 확장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과학부인주의자들이 객관성에 대한 언론의 집착을 어떤 식으로 이용했는지 살펴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전면광고를 실을 필요가 없었다. 어떤 과학적인 주제에 대해 ‘다른 연구’가 존재하는데도 언론이 해당 연구를 다루지 않으면 그 언론이 편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라고 겁박을 주기만 하면 되었다. 미끼를 물어버린 언론은 기후변화나 백신과 같은 과학적 문제조차 ‘논란이 많은 이슈’라고 착각하면서 양쪽 입장을 모두 보도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 ‘논란’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사람들이 꾸며낸 거짓인데도 말이다. 허위 정보를 퍼뜨리려는 시도를 언론마저 방조하는 가운데 결국 일반 대중은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

‘현실’을 파악할 수 있는가?

‘현실’ 자체가 존재 하는가?

이 의문들은 결국 ‘객관’과 ‘진실’에 대한 포기입니다.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는데 있어 객관이 가능한가. 진실이 있는가하는 의문을 넘어 현실에서 필요 없다고 인식하게 됩니다.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 ‘객관’과 ‘진실’을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됐습니다. 인지편향(인지부조화, 집단 동조 이론, 확증편향이론, ‘역화 현상’, ‘ ‘더닝 크루거 효과’ 등 )

인간은 자신의 신념과 행동 사이에서 조화로운 지점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으며, 이 조화가 무너질 때 심리적 불안감을 겪는다. 이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인간이 최우선 목표로 삼는 것은 자신의 자존감을 지켜내는 일이다.(59)

인지부조화의 특성 가운데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주위에 동일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을수록 인간의 ‘비합리적인’ 경향이 더욱 강화된다는 점이다. 만약 종말론을 혼자 확신하고 있다가 현실에 직면했다면 자살하거나 은둔해버릴지도 모르지만 잘못된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과 함게한다면 말도 안되는 오류마저도 합리화할 수 있다.(62)

즉, 확증 편향을 통해 개인들이 자신의 기존 신념, 가치, 사고 방식과 일치하는 정보를 선호하고 받아들이려는 경향을 갖게 되고, 이 의도적 합리화를 통해 자신의 믿음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는 어떤 사실, 정보를 접하면 근거 없이 과신하게 된다. ( 64-65)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반하는 증거를 맞닥뜨리자 증거를 부정하고 잘못된 신념을 계속 고집하려고 했다. 반대 증거를 확인 한 뒤 잘못된 신념을 더욱 강화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73-76)

더닝‘크루거 효과가 충격적인 이유는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수행 능력이 가장 떨어지는 사람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77-80)

그러나 *이처럼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수많은 인지 편향이 우리 뇌의 일부분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비판적 추론 능력을 주의 깊게 학습하고 훈련하다 보면 인지 편향이 우리의 신념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를 어느 정도 조절할 수는 있겠지만, (82)

과거 우리는 이같이 비판적 추론 능력을 주의 깊게 학습하고 훈련한 사람들을 지식인, 전문가라고 불렀습니다. 이 지식인과 전문가들은 진리를 추구하고 진실을 탐구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이들이 과학자와 언론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탈진실을 만들어낸 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이 이 둘을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자, 진실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인 과학자와 언론인이 무너졌습니다.

진실은 정말로 죽었는가?

“지금 우리는 명백한 사실을 거듭 외치는 것이 지성을 가진 사람의 첫 번째 의무인 절박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조지 오웰-

거짓말에 맞서 싸워야 한다.

탈진실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사실 문제를 모호하게 만드렬는 그 어떤 시도에도 의문을 제기해야 하며 어떠한 거짓에도 맞서 싸워야 한다.(208)

탈진실이든 선진실이든, 진실을 무시하는 태도는 정말로 위험하다. 바로 이것이 책에서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탈진실 현상은 우리가 ‘사실’과 ‘진실’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의견’과 ‘감정’이 영향을 미치도록 허락할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우리가 현실 자체로부터 멀어지는 위험을 감수하게 만든다.

분명 다른 길도 존재한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방관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선진실은 물론 탈진실도 극복할 수 있다. 탈진실 현상은 현실 자체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우리 인간이 현실에 반응하는 방식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우리가 더 나은 뉴스미디어를 원한다면 제대로 된 뉴스미디어를 지원하면 된다. 오늘날 세상에서 누군가가 우리의 눈을 속이려고 아무리 애쓴다고 하더라도 결국 세상에 어떻게 반응할지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진실은 지금까지 늘 소중했고 앞으로도 계속 소중할 것이다. 제때에 이 사실을 깨달을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225- 227)

결국 탈진실 시대는 이미 도래해있고, 정치적인 모든 사안에서 탈진실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