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폴 사르트르

오늘은 장 폴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읽고 모였습니다. 지식인은 왜 비난을 받고 있으며, 장폴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해 변명을 하는 걸까요.

사르트르는 지식인이 비난을 받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지식인이 되기 이전에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대리인이었던 그가 지식인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대리인으로서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바로 비난의 기원인 것입니다.”

오늘 포럼에선 지식인이란 무엇인지, 지식인이 비난을 받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들었던 생각을 한 번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어떠셨나요?

우리가 앞선 포럼에서 얘기했던 파레시아, 진실을 말한다는 것에 대해 이해했고, 진실을 말하기가 나의 삶의 태도에서 또 공동체에서의 태도라는 태도에 대해 고민행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책에는 실천에 대한 내용도 담겨 있습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모든 실천은 몇 가지 계기를 포함합니다. 행위란 아직 없는 것을 위하여 지금 있는 것을 부분적으로 부정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정은 숨겨진 것을 드러내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또한 긍정을 동반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부정 속에서 우리는 지금 있는 것을 가지고서 아직 없는 것을 실현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없는 것의 관점으로부터 출발해서 지금 있는 것을 드러내는 파악 작업은 가능한 한 정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파악 작업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을 이미 주어진 것 속에서 찾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실천은 현실을 드러내고, 현실을 극복하며, 현실을 보존하는 그리고 현실을 미리 앞서서 변경하는 실천적인 지식의 계기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재를 파악할 때, 방향이 주어진 자기 고유의 변화 가능성을 존재 자신속에 담고 있는 것처럼 존재를 파악하는 실천적인 탐구, 실천적인 진리가 이 수준에 위치합니다. 진리는 이처럼 비-존재로부터 출발해서 존재에 이르며, 실천적인 미래로부터 출발해서 현실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실현된 기도란 결국 발견된 가능성에 대한 실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실천적인 지식은 무엇보다도 먼저 발명입니다. 즉 가능성이 발견되고 사용되며, 가능성이 실증되기 위해서는, 우선 그 가능성 자체가 발명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곧 기투하에 해당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아직 없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서 이미 있는 것을 발명하기 때문에 창조자이며, 인간은 기도를 훌륭하게 성사시키는데 필요한 여러 가능성을 엄밀하게 규정할 때만 일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에 학자인 것입니다. 인간은 또 탐구자이자 이의를 제기하는 자이기도 합니다. (16-17p)

또 사르트르가 말하는 지식인이란 무엇인가요?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와 지식인은 어떻게 다를까요?

지식인이란 자기 자신 속에서, 그리고 사회 속에서 실천적인 진리(자기의 모든 규범까지 포함한 실천적인 진리)에 대한 탐구와 지배 이데올로기(자기의 전통적인 가치 체계까지 포함한 지배 이데올로기) 사이에 벌어지는 대립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된 기능을 통해 그 존재가 정의되는 사람들 중에서 지식인은 특수한 경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15 p)

지식인은 언제나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들 중에서 나옵니다. 지식인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식인이라는 사회적 범주가 현재 지니고 있는 성격부터 열거해보아야 합니다.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는 위로부터 모집됩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지식인은 지배계급에 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배계급은 고용을 결정함으로써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를 그의 존재 속에 임명합니다. 이를 통해 연구 전문가이면서 동시에 지배계급이 가진 헤게모니에의 봉사자, 즉 전통의 수호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부구조 관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철학자는 자신의 계급의 유기적 지신인이 될 수 있는 행운을 갖고 있었습니다. ‘인간성’에 대해 주입시켰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를 구성하는 또 다른 부분인 탐구자로서의 기능, 즉 그의 지식, 그의 방법과 모순을 일으킵니다.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는 우선 그의 지식, 그의 방법을 통해서 보편주의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보편적인 앎과 보편적인 실천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가 그의 방법을 적용하여 지배계급과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고려하는 순간 이 둘 모두가 다 실제로는 교활한 방식으로 특수주의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탐구에서마저도 소외를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에게 낯선 목표이자 자신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금지된 목표의 수단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40)

당시의 “철학자들은” 오늘날 지식인이 사람들로부터 비난받는 바로 그 이유가 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들은 자신들의 방법을, 그 방법이 취해야 할 목적과는 전혀 다른 목적을 위하여, 즉 기계론적이고 분석적인 과학주의 위에 기초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건설하기 위하여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즉 철학자들은 그람시가 말한 유기적 지식인처럼 등장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나아가 외적인 한계선이 탐구 정신 자체로부터 비롯된다고 그 자신이 믿으려 하고 또 타인들로 하여금 믿게 함으로써 그가 자신의 탐구정신에 정말로 외적인 한계선을 긋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간단히 말해 과학적, 기술적 사유는 오로지 통제 아래서만 사유 자신의 보편성을 전개해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특수주의에 무릎을 꿇어버린 과학은, 그 자신이 보편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자유로우며 엄격한 자신의 보편적인 핵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가는 것입니다.(43)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아직까지 존재합니다. 부르주아지가 자기 자신을 휴머니스트라고 부르기를 고집하는 일, 또 서구 세계가 스스로를 자유세계로 부르는 등의 일이 그렇습니다.

목표가 목표의 실현을 위해 사용된 여러 수단을 통합한 단일체가 되는 바로 그 순간에 이를 때까지 인간은 수단을 가지고 목표를 검토하고 또 목표를 가지고 수단을 검토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근대사회에서 목표는 지배계급에 의해서 정의되고 노동계급에 의해서 실현됩니다. (19p)

그러나 지배 계급의 목표가 무엇이 되었든 상관없이 전문가의 행위는 우선 그 자체가 실천적입니다.

이 말은 그의 행위가 유익한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사가 암을 치료하기 위한 탐구를 할 때, 그 탐구가 부자를 치료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유함 또는 궁핍함은 암세포와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환자에 대한 이런 비결정은 필연적으로 환자의 보편화로 이해됩니다. 즉 암을 치료하기 위한 탐구는 모든 사람을 치료하기 위한 탐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건을 놓고 보면, 의사는 지배계급이 희소성과 이익을 따라 정의해놓은 관계의 체계 속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그의 탐구는 초기에 들어가는 비용 문제와 신빙성 여부 문제로 인해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혜택을 주게 됩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사회의 특권층은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와 공모하여 그의 발견물에서 ‘사회적 유익함’을 훔쳐낸 뒤, 그것을 다수를 희생시켜서 얻은 소수의 유익함으로 바꾸어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상대적 빈곤화입니다.

결국 지식을 가진 모든 전문가는 잠재적인 지식인에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보편주의적 기술과 지배 이데올로기가 자신 속에서 항구적으로 싸운다고 할 때 그 싸움, 즉 ㅁ순에 의해서 정의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전문가가 실제적인 지식인이 되는 것은 결코 단순한 결심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문가를 특징짓는 긴장을 전문가 자신으로부터 떼어 드러낼 수 있었던 바로 그 전문가의 개인적인 역사에 의해서 좌우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식인이 될 수 있을까요?

지식인은 자신의 이데올로기가 지닌 특수주의를 확인하고서 그 특수주의에 만족할 수 없게 될 때, 그가 자신에 대한 검열을 통해 권력자의 원칙을 자신의 원칙으로 내면화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그가 자기 마음의 거북함과 손상을 거부하기 위하여 결국 자신을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게 될 때, 그가 헤게모니의 하위 대리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또 자신이 모르는 목표나 이의 제기가 금지된 목표의 수단이 되기를 거부하고 또 자신이 모르는 목표나 이의 제기가 금지된 목표의 수단이 되기를 거부하게 될 때, 바로 이때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대리인은 어떤 괴물이 될 수 있습니다. 즉 그는 자신과 관계된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외적으로는 자신의 삶을 인도해가는 원칙에 대해서, 내적으로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지식인,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무관한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 지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50-51p)

지식인이란 자기 자신 속에서, 그리고 사회 속에서 실천적인 진리(자기의 모든 규범까지 포함한 실천적인 진리)에 대한 탐구와 지배 이데올로기(자기의 전통적인 가치 체계까지 포함한 지배 이데올로기) 사이에 벌어지는 대립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이 실재적인 깨달음이 되기 위해서는 이 깨달음이 우선은 지식인에게 있어서 그의 직업 활동과 기능의 수준에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 시작이 이처럼 개인적이라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이 깨달음은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을 드러내는 깨달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지식인에 대한 문장

- 지식인의 목표는 실천적 주체를 실현하는 일이요, 실천적 주체를 배출하고 지탱해줄 사회의 원칙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목표의 실현을 갈망하면서 지식인은 그의 조사를 모든 수준에 걸쳐서 실행하며 또 자신의 사유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수성에 있어서까지도 스스로를 변경시키고자 시도합니다.

- 지식인은 자기 고유의 영역 속에서 보편성이 결코 완결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오히려 보편성은 계속해서 만들어가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보편의 전문가입니다. 실제로 자신이 하는 일에서 무언가 진전을 이루고자 할 때, 지식인이 피해야 할 커다란 위험 중의 하나가 성급하게 보편화하는 일입니다.

지금 당장 보편주의적 관점을 취하는 이들은 우리에게 안도감을 줍니다. 왜냐하면 사이비 지식인에 의해서 보편적인 것이 이미 성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지식인⏤즉 불편함 속에서 자기 자신을 하나의 괴물로 파악하는 지식인⏤은 우리에게 불안감을 줍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보편적인 인간이란 만들어가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75P 사이비 지식인 예시) 지식인이란 전쟁을 그저 도덕적으로 비난하면서, 지금 이 순간 그 자신이 폭력이 난무하는 우리의 세계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언젠가는 이상적인 평화가 통치하게 될 것이고 꿈을 꾸는 도덕주의자요 이상주의자라고 여기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사이비 지식인의 태도 때문입니다.

지식인이 자기에게 고통을 주는 이 모순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그가 모순에 대하여 자기 나름의 거리를 취할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만일 그가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미래 속에 자리잡을 것을 주장한다면 그는 자신의 목적을 완전히 잃게 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미래를 모르며, 또 혹시 그가 미래의 일면을 짐작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가 자신 속에 지닌 편견을 통해, 따라서 그가 스스로 되돌아가기를 원하는 꼴이 될 바로 그 모순을 통해 짐작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또 만일 그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판단하기 위해 사회 바깥에 관념적으로 자리 잡으려고 시도한다면, 잘해봤자 그는 자신의 모순을 자기 자신과 함께 사회 바깥으로 가지고 나간 꼴이 되고 말 것이며, 잘못하면 (경제적으로) 중간계급 위에 군림하면서 중간계급을 내려다보는 그 거대한 부르주아지에 자신을 일치시키게 됨으로써 결국에는 아무런 이의 제기 없이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는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지식인이 자신의 사회를 이해하는 방법은 유일합니다. 그것은 바로 가장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들 가장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이 보편성을 대표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편성이라는 것은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조리한 특수화에 맞서서 가장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이 싸울 때, 이들 역시 보편성을 추구하는 길로 인도되게 됩니다. 물론 이렇게 추구된 보편성은 결코 부르주아지의 보편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정적인 기원을 갖는 구체적인 보편성, 즉 특수주의가 청산되고 계급 없는 사회가 도래할 때 태어나게 될 보편성인 것입니다.

피착취계급은 ⏤비록 그들의 깨달음이 가변적임에도 불구하고, 또 그들 속에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깊숙이 침투해 들어가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 그들이 지닌 객관적인 지성에 의해서 특정지어집니다. 이 객관적인 지성은 우리가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를 바라보는 피착취계급의 관점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객관적인 관점이 근본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말하자면 급진화에 가장 적합한 가장 낮은 수준으로부터 출발하여 사회를 바라보는 민중의 사유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바로 이 급진적이고 단순한 사유를 지식인이 자기의 입장에서 취할 수 있게 될 때, 지식인은 자신의 진정한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지식인은 어떤 한 사건을 통해서, 어떤 한 이념을 실어나르는 사실을 통해서, 하나의 특이한 보편을 통해서 끊임없이 구체적인 것과 마주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지식인은 마주하는 이 구체적인 것에 대해서 오로지 구체적인 답변만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식인이 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무엇일까요?

그 일은 민중 계급 속에서 이데올로기의 계속적인 재등장과 맞서 싸우는 일입니다. 그 일은 민중 계급이 그들 자신과 그들의 권력을 가지고서 할 수 있는 모든 이데올로기적 재현을 민중 계급의 안과 밖에서 파괴하는 일입니다.

2. 그 일은 지배계급에 의해 주어진 지식-자본을 민중 문화를 고양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일입니다. 즉 보편적인 문화의 기반을 닦는 일입니다.

3. 그 일은 주어진 현실의 상황 속에서 필요할 경우,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들을 혜택 받지 못한 계급 속에 형성하는 일이며, 또 이 전문가들로 하여금 노동 계급의 유기적 지식인들이 될 수 있도록, 또는 적어도 유기적 지식인들에 가장 근접한 전문가들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4. 그 일은 지식인 자신의 고유 목표(지식의 보편성, 사유의 자유, 진리)를 되찾고, 그 목표 속에서 싸움을 통해 도달해야 할 만인을 위한 실재적인 목표, 즉 인간의 미래를 보는 일입니다.

5. 그 일은 눈앞의 과제를 넘어 보다 멀리 있는 과제를 보여줌으로써, 즉 노동계급의 역사적 목표로서의 보편화를 보여줌으로써 진행 중인 행동을 급진적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6. 그 일은 모든 권력⏤대중정당과 노동계급의 조직에 의해서 표현되는 정치권력까지 포함한 모든 권력⏤에 대항하면서 대중이 추구하는 역사적 목표의 수호자가 되는 일입니다. 이때 목표는 사실상 수단들의 총체로서 정의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지식인은 어떤 수단이든 효과가 잇는 모든 수단은 좋은 수단이다라는 원칙을 따라서 수단을 검토해야 합니다. 단 추구되는 목표를 변질시키는 수단은 제외하고 말입니다.

이에 못지 않게 강조해야 할 분명한 사실은 지식인들의 의견 불일치가 운동과 사유를 약화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지식인들은 자신들 사이에서 적대적인 일치를, 말하자면 변증법적 합의를 정립하고 유지하며 재정립하려는 시도를 해야 합니다. 즉 모순은 필연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제약을 통합의 방식으로 초월하는 일이 언제나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따라서 자기의 관점에 타인을 집요하게 끌어들이려 하지 않고 두 논지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서 양쪽 모두를 초월할 수 잇는 가능성의 조건을 창조해내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변증법적 합의를 정립하고 유지하며 재정립 하려는 시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