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음에서는 인간으로서 솔직하지 못한 채 스스로에게 주어진 삶의 질문을 회피 하게 되면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를 나눴고, 나에게 주어진 질문을 답하지 않은 채로 내면을 향해야 할 시선을 타인 또는 구조로 돌리게 되어 비겁한 선택을 하게 되면서 스스로에게 분노하게 되는 모습을 보았다. 과연 이것은 일본사회만이 가지고 있는 문제일까?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모습들이 없을까?

<우리는 왜 분노하게 되는가?>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질문들을 잘 마주하며 살고 있을까? 칸트에 따르면, 인간들의 那라는 그 자체로 목적들의 나라이기 때문에, 인간이란 존재는 그 자체로 수단이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 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수호하는 말이며, 그 자체로 개인의 삶이 삶 자체로 존중 받아야 한다는 맥락과 함께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여전히 누군가가 수단으로서 존재하게 되고, 심지어는 스스로가 수단이 되는 것에 대해 무지한 채, 사회에 속하게 된다.

개인의 분노는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을 느낄 때, 분노를 나눌 누군가가 없을 때 일어나게 된다. 영화 조커(2019)에서도 개인이 가지는 분노가 어떻게 표현되는지가 잘 나타난다. 주인공은 정말로 열심히 살아가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한 시민이었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번번이 사회에서 외면 받고, 소외된다.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무언가를 성취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휩싸이게 되고, 스스로 조커가 되어간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모두 “우리 모두 조커가 될 수 있다.” 라는 말을 하며 영화에 공감을 하는 분위기이다.

이와 같이 우리 사회에서도 정말 많은 분노의 상황들이 존재한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분노하게 되고, 그것이 진영을 갈라서서 싸우게 되면, 궁극적으로 개인간의 연대와 공감이라는 가치는 무너지고 병들게 된다. 우리는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서로에 대한 분노를 어떻게 생각하고 다뤄야 할까?

<분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분노는 개인의 욕망이 구조에 의해 억눌릴 때 그 방향이 바깥으로 표출되기도 하지만, 스스로의 욕망이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했을 때도 일어난다.

지음에서는 인간 모두가 다양한 주체성을 가진 존재이고, 그 주체성은 위에서 이야기한 칸트의 말과 함께 지켜져야 할 권리라고 이야기 했다. 따라서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내 안에 존재하는 분노가 무엇인지 그 원인을 정확히 알아야 하고,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욕구와 심리 상태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분노를 다스릴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나눴다. 그 다음, 내 안의 상태를 언어화 하여 주변의 사람들과 나누고, 공감할 필요성을 느꼈다.

분명 우리 사회에서도 개인이 가지고 있는 욕망과 주체성을 억누르는 구조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그러나, 분노라는 거친 감정은 쉽게 전이가 되고, 강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시선을 나 스스로에게 돌려 나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노력을 통해 우리는 구조적으로 개인을 억누르는 폭력에 대응할 수 있다. 나 스스로가 왜 분노했는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해야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감정을 바라보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나는 분노는 쉽게 그 방향이 밖으로 전환이 되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억눌린 상태의 감정을 해소하기만을 원한다. 그런 해소는 대부분 폭력적인 모습을 띤다.

여전히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분노하고, 여러 문제에 관해 진영을 갈라서고 귀를 닫고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과연 그것이 주체적인 인간의 다양성을 추구하기 위한 분노인지, 우리 안의 소리를 듣지 않은 채 분노라는 단어에만 사로잡혀 모이게 된 것인지 우리는 주의 깊게 살펴보고 이야기를 나눌 필요성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마지막 주에 지음은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분노의 감정이 악인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 대해 다시 정리하고, 그 과정에서 인간다운 선택을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해보기로 했다.

이미지 출처: JOKER - Teaser Trailer Screens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