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발제자 조현준


21.11.14

머리말


이 책의 원 제목은 The Art of Loving.
사랑을 잘 할수 있는 기술이나, 지침서라기보다는 사랑 그 자체에 대한 이론.
쉽게 말해 ‘사랑론’이라고 볼 수 있음.
이 책은 독자들에게 가장 능동적으로 자신의 퍼스널리티 전체를 발달시켜 생산적 방향으로 나아가는것이 사랑에 성공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이야기함.

사랑하는것은 물론 어렵고 힘들지만 포기해서는 안됨. 겸손, 용기, 신념, 등, 어렵지만
해내야만 하는 요소들을 훈련해야함.

사랑은 기술인가 ?

현대인들은 사랑을 갈망하고, 행복한 사랑 이야기, 불행한 사랑이야기의 무수한 영화들을보며, 수백가지의 노래에 귀를 기울임. 하지만 사랑을 배워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뭄
● 현대인들이 놓치고 있는 많은 문제는 ‘어떻게 사랑할지’를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지’로 착각하는 문제임. 남자는 권력을 장악하고 돈을 모으는것, 여자는 몸을 가꾸고 치장을 하는 매력을 갖추는것이 그 예임. 또다른 전략은 유쾌한 태도와 흥미, 둥글둥글한 매력임.
● 사랑에 대해 현대인들이 하는 또다른 착각은 ‘주변에 사랑할만한 사람이 없다’로
생각하는것임. 요즘의 문화는 구매욕, 상호간의 거래 개념이 너무나 자연스러움. 개인을 매력적이게, 품질을 높이는 그러한 측면이 강해지고 있음.
과거에는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튼튼한 소녀가 매력적이었으나 오늘날은 가정적이고얌전하기를 요구함. 19세기말 20세기 초에도 매력적인 ‘포장’을 위해 남자는 공격적이어야 했으나 요즘은 사교적이어야 함.
● 세번째 착각은 사귀는것, 남녀간의 만남이 사랑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임.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오래 지속될 수 없음. 두 사람이 친숙해질수록 친밀감이 늘어나다 결국 적대, 실망, 권태가 생겨나며 서로에게 실망하게됨. 강렬하고 서로에게 열정적인것을 사랑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얼마나 외로운지를 입증할 뿐임.
● 지속되는 사랑의 실패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 또한 ‘기술’임을 깨닫는 것임. 건축, 그림, 음악등을 배우는것처럼 사랑 또한 동일한 과정을 거쳐야함.

이 책은 1. 사랑에 관한 이론 2. 사랑에 관한 실천으로 나눠 진행함.
물론 사랑을 배운다 해도 돈을 벌거나 특권을 가질 수는 없음. 이 ‘사랑의 기술’을 배우는 이유는 오직 ‘영혼’에 유익할 뿐임.

사랑의 이론
● 사랑에 관한 이론은 인간의 실존으로부터 출발해야함. 인간의 실존이라는 것은 나
스스로의 존재가 분리되어 있는 ‘독립된 개체’라는 것을 의미함. 분리되어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불안, 죽음에 관한 무력감이 인간 실존의 고독성임.
이런 인간의 실존에 있어 발생하는 가장 절실한 욕구는 고독이라는 감옥을 벗어나려는 욕구임. 이것을 ‘절대적’으로 실패할때 광기가 생김.
인간의 모든 시대는 이러한 분리상태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어떻게 결합하는가, 내 개체적 생명을 초월하여 어떻게 합일을 찾을것인가?의 문제로 직결됨. 이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자연의 섭리중 하나임. - 종교와 철학은 이러한 대답의 역사임.
▶ 인류의 유아기시절(고대)에는 자연과 일체감을 느낌. 토템이나, 동물신 등으로 극복하려 함.
▶ 진탕 마시고 떠드는 상태 또한 일시적 광희를 통해 외부세계와의 분리감을 없애고
도취적으로, 분리문제를 해결하는 시도임.(성적 결합, 성적 경험 또한 밀접히 관련되어있음.)
이러한 도취 경험은 얼마동안은 괴로움이 없음. 하지만 분리에 의해 생긴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성적 도취는 결과적으로 분리감을 더욱 증대시킴. 사랑이 없는 성행위는 한순간을 제외하고는 두 인간사이의 간격을 좁히지 못함.
도취적 합일의 특징 ▶강렬하고 난폭함 ▶퍼스낼리티 전체, 몸과 마음에 모두 일어남
▶ 일시적이고 주기적임. 이와 반대되는 노력은 집단-관습, 관례, 신앙 등 공동체의식 안에서의 합일임.
● 로마의 경우 가난한 로마인 조차도 ‘나는 로마인’이라고 말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긍지를 느꼈음. 서양 사회에서 집단과의 합일이 일반적으로 많이 나타나는 행태.
그러나 이러한 상황 또한 평등이라는 이름 아래 개인이 가진 모든 개성과 고유성을
삭제하려는 문제가 존재함. 평등이란 인간은 모두 존엄하며, 개인간의 차이를 존중하고, 독특한 실재임을 인정하며 저마다의 우주를 이해하는것으로 부터 시작해야함.
★ 오늘날의 평등은 일체성 보다는 동일성을 의미함. 남녀간의 성적 차이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개체이기때문에 평등한게 아니라 오히려 ‘동일하게’ 취급함. 이것은 개성화된 평등이 아닌 비개성화된 평등임.
● 개성화된 평등으로부터 시작되는 합일은 강렬하지도 않고, 난폭하지 않음. 그러나
비개성화된 평등은 고유성을 실종시키고, 모든것을 동일하게 취급함. 이러한 상황에서는 개개인의 실존적인 사랑의 조건이 불충분해짐.
● 스피노자는 감정을 능동과 수동으로 구분하여 나눔. ‘행동’ 과 ‘격정’으로 표현함.
선망, 질투 , 야망, 탐욕등은 격정(수동적)이며 사랑은 행동이며 인간의 힘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표현함.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님.
모든 사랑의 행위는 주는것에 있음. 내가 가진 힘, 내가 가진 실존적 생명의 힘을 행사하는 것이 사랑임. 이러한 행위는 생명(사랑)을 줌으로써 타인을 풍요롭게 만들고 자신의 생동감을 느끼며 타인의 생동감을 고양시킴.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 관심이다.” - 마르크스
● 사랑의 또다른 요소는 ‘존경’임. 만약 ‘존경’이 사랑의 요소가 아니었다면, 책임이 쉽게 지배와 소유로 변질될 것임. 책임은 지배하고 있는 자의 것이 아님.
‘존경'은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임. 이런 존경은 착취가 존재할 수 없음.
에리히 프롬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이바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자신을 위해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람.
스스로의 독립을 성취할때, 남을 착취하지 않을때 존경의 조건이 설립함.
누군가를 존경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잘 알아야함. 맹목적 존경은 공허함을 낳음.
● 인간은 때문에 누군가를 알고자하는 욕구가 자연스럽게 내재되어있음. 이를 위한 방법은 사랑임. 나 스스로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다른사람을 이해하려 할때, 인간이라는 존재에 미약하나마 다가갈 수 있음.
남성적 요소와 여성적 요소라는 태초의 차이는 양극단에 놓여짐. 이는 합일을 자연스럽게 바랄 수 밖에 없는 구조임.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받아들이며 동시에 비밀을 알기위해 침투하는 태도가 사랑의 태도임.
● 프롬은 프로이트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음. 프로이트는 성욕을 사랑의 합일의 결과가 아닌 성적 만족으로만 해석하여 설명함. 이 방식이라면 자위행위는 이상적 성적 만족에 해당함.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남녀의 양극성을 오직 성적 결합으로 해소하려는 태도에 지나지 않음. 이러한 상황이유로 인해 프로이트는 극단적 가부장주의를 지니게 됨.(프로이트는 성욕이 본질적으로 남성의 것이라고 이야기함.)
이러한 태도는 여성의 성욕을 무시하게 됨.

부모와 아이간의 사랑
어린아이의 사랑은 ‘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의 원칙이지만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대가 필요하다.’는 것임.
어머니의 사랑은 아이를 탄생시킨 대지이자 대양, 세계 자체임. 이러한 사랑은 뿌리를 내리고 생명을 키우며, 그것이 잘 자라고 독립할 수 있도록 무한한 가능성과 햇빛을 제공하는 것임. 아버지의 사랑은 참을성이 있고 관대한 사랑. 자신의 권위 위에서 아이가 규칙과 방법을 배울 수 있도록 지켜보고 가르치되, 동시에 아이가 아버지의 권위로부터 벗어나 스스로의 권위를 세울 수 있는 것을 믿고 지켜보는것임.
어머니다운 양심은 ‘어떠한 악행이나 범죄도 너에 대한 나의 사랑, 너의 삶과 행복에 대한 나의 소망을 빼앗지 못한다’라고 말함.
아버지다운 양심은 ‘네가 잘못을 저지르면 너는 네 잘못의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하고 내 마음에 들고 싶다면 너는 너의 생활방식을 크게 바꾸어야 한다’고 말함.
성숙한 사람은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독립적이되 그 모습 모두를 내면에 간직한 사람임. 서로 다른 모순적 태도이지만 이 두 양심을 모두 가지고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내면적 합일의 태도임.
사랑의 대상
● 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가 아님, ‘대상’이 아닌 태도와 성격의 방향임.

모성애
모성애의경우 어린아이를 아직도 자신의 일부라고 느끼는 어머니의 사랑과 탐닉은
자아도취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 모성애의 참된 본질은 아이의 성장을 돌보는 것이며 이 태도 자체가 그녀로부터 어린아이가 분리되기를 바란다는 뜻임.
이는 곧 모든것을 주면서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어려운 과업으로 이어짐.
자아도취적인 모성애는 어린아이가 연약할때만 사랑하는 어머니의 모습임.
참으로 사랑하는 모성애는 ‘스스로의 실존’을 끊임없이 고민하며 어린아이가 분리과정을겪을때도 사랑하는 어머니임.

성애
성애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경험과 혼동됨. 그러나 이러한 갑작스런 친밀감은 오래갈 수 없음. 더욱 더 잘 안다는 착각이 오히려 장벽을 더 허물지 못하는 이유임 (나도 나를 잘 모르겠는데, 너가 날 어떻게 잘알아?)
성애가 강렬한 사랑의 감정. ‘사랑에 빠지는’ 찰나의 과정이 아닌 이유는 ‘의지’라는 요인이 있기 때문임. 우리는 의지라는 표현을 통해 사랑을 결단하고, 약속함. 우리는 모두 인간이라는 존재이지만 모두 독특하고, 복제할 수 없는 실재임.
“우리가 모두 하나인 한, 형제애(인류애)를 바탕으로 인간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또 서로 다른 한, 특수하고 매우 개별적인 요소를 바탕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

자기애
자기자신에 대한 사랑은 이기심인가? 오히려 그 반대인가?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크기 만큼 스스로를 사랑하고 있음. ‘스스로의 생명, 행복, 성장, 자유에 대한 긍정’은 ‘스스로의 사랑의 능력’과 밀접히 결부되어있음.
‘비이기적인’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다른사람을 위해서 살 뿐이고’ 자기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것을 자랑함.
그러나, ‘비이기주의’라는 표면 뒤에는 매우 강렬한 자기 본위가 숨어있음. 많은 ‘비이기적인’ 어머니는 자신의 이러한 비이기심이 사랑을 가르칠것이라 믿지만, 오히려 아이들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어머니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끊임없이 불안해하며 긴장해있음.
또한 어머니의 기대를 따라 살려고 애를 씀. 이는 이기적인 어머니와 다를 바가 없음. 오히려 더 나쁨.
마이스커 에크하르트- “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면, 그대는 그들을 한 인간으로 사랑할 것이고, 이 사람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사람도 사랑하는 위대하고 올바른 사람이다.

현대사회에서 사랑의 붕괴
오늘날 인간의 행복은 ‘즐기는 데’ 있음. ‘만족스러운 소비’를 하고 상품, 구경거리, 음식, 술, 담배, 등을 ‘입수하는 것’을 말함. 모든것이 소비되고 모든것을 삼키는 행위. 영원히 갈망하며, 영원히 기대하지만 영원히 실망하는 상황.
이러한 상황은 서로의 배우자 또한 소유하고, 갈망하는 상황이 됨. ‘두사람만의’ 이기주의는 사랑과 친밀감으로 오해됨.
사랑은 성적 만족의 결과가 아니며 성적 행복의 결과임. 그럼에도 사랑은 상호간의 성적 만족이 충족될때 발생하는 결과물로 설명됨. 프로이트에게 사랑은 기본적으로 성적 현상이었음.
상호 성적 만족으로서의 사랑과 ‘팀워크’로서 고독으로부터 피난처로서의 사랑은 현대사회의 병리적 증상의 두가지 형태임.
이러한 신경증적 애정관계에서 남자들은 어머니의 젖에 아직도 매달려 있는 사람들을 뜻함. 그들은 어머니의 무조건적 사랑, 곧 그들이 필요로하고, 그들이 그녀의 자식이고 무력하다는 이유 없이 베풀어지는 사랑을 바람. 이러한 사람들은 여자를 유인하려 할때 매우 정답고 매력적임. 그러나 관계에 있어 그들은 매우 표면적이고 무책임함. 그들의 목적은 사랑받는것이고 사랑하는 것이 아님. 이들이 올바른 여자를 만나면, 그들은 안전감을느끼고 상당한 애정과 매력을 발휘함. 그러나 얼마 후 여자가 계속해서 그들의 환상적 기대에 따라 살지 않게 되면, 그들에게는 갈등과 분노가 생김.


● 여자가 그들을 한결같이 찬양하지 않으면, 여자가 그녀 나름대로의 생활을 주장함면, 여자가 사랑받고 보호받기를 원하면, 남자는 깊이 상처를 받고 실망을 느끼며, ‘이기적이고 군림하려고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됨.
이러한 어머니 중심적인 사람은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사람을 만날 경우 성숙하지는
못하더라도 ‘잘 적응해’ 살 수 있음. 그렇지 않은경우 심각한 애정결핍과 우울, 불안이 생김. 때로는 사랑이라는 구실로, 의무라는 구실로 이러한 어머니들은 어린아이와 청년과 어른을 자기자신 안에 묶어두려고 함. 어머니는 소생시키는 자이며 멸망시키는 자임.
● 또다른 증세는 아버지의 애착증세에서임.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 아버지의 유일한 애정을 원하기 때문에,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것을 실패했을때, 아들은 기운을 잃고, 사랑받지 못하고 버림받음. 그들은 그러나 여자관계에서는 멀리 떨어져있음. 그들은 여자에 대해 가벼운 경멸감을 가지고 있음. 왜냐하면 아내를 맞았을때, 아내로 못대하고 아버지가 딸을 대하듯 행동하게 되는데, 아내가 그것을 수용하지 않으면 그들은 실망함.
● 부모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억제하거나 불만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을때, 이러한 경우는 더욱 복잡함. 소녀는 그 안에서 ‘예의 바른’ 분위기를 경험하지만 아버지나 어머니와 밀접해지지는 않기 때문에 더욱 당황하고 무서워함. 소녀는 어버이의 생각을 절대 알 수 없음. 이 결과 소녀는 자기 자신의 세계에 빠지고 겉돌며, 애정관계에 있어서도 이러한 태도를 유지함. 이러한 움츠림은 강렬한 불안과 같은 감정이 생기며, 피학대 음란증적 경향을 갖게 됨.
이러한 경우는 여자는 남편을 야단치고 소리지르게 만들기를 좋아함. 왜냐하면 이 행위를 통해 긴장이라는 무거운 짐과 공포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임.
● 사랑에는 다양한 실존의 문제가 존재하는데, 이러한 문제를 아이에게 투사함으로서 자신의 실존을 찾으려는 문제가 생김. 자신의 생활에 의의가 없다고 느낄때, 그는 자식들의 생활을 통해 의의를 느끼려고함. 불행한 결혼의 문제에 있어서도 어버이들은 흔히 화목한 가정이 주는 행복을 자식들에게서 빼앗지 않기 위해 헤어지면 안된다는 생각을 함. 대개는 ‘화목한 가정’의 표면 안에 존재하는 불행과 긴장이 ‘공공연한 결별’보다 해로움.
●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짜 갈등이 무엇인지를 알려는 태도가 필요함.
사랑은 갈등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님. 서로의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사귈때, 각각의 실존, 스스로의 개성 위에서 사귈 수 있을때, 사랑이 가능함.
사랑은 휴식처가 아니라 함께 움직이고 성장하고 일하는 것임.
실존의 본질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닌 각자의 생기를 가지고 힘(사랑)을 실천해야함.
현대인은 많은 부분에서 퍼스널리티 시장을 형성하고 그 안에서 비개성화 되어있으며 소외되어있기 때문에 사랑하기 매우 어려움(나다운 사랑)

마지막 장에서는 사랑의 실천을 알아볼 것임.
사랑의 실천
● 실천이라는것은 특수한 한 순간에 있는것이 아닌 매일 그것에 대해 고민하고 훈련하는 적극적 태도를 말함.
기술의 실천이나, 어떤 배움을 실천할때 정신 집중이 필요하듯, 사랑에도 ‘정신 집중’은 필수적 조건임.
매일, 매순간, 외부로부터 강제된 규칙이 아닌 본인의 의지로 하루를 살아갈 필요가 있음.
동시에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순간순간을 느끼며 살아야함. 음악감상, 독서, 사람들과의 대화, 경치구경 등에 전념할 수 있어야함.
● ‘정신집중’을 위해서는 순수하지 못한 대화를 피해야함. 둘다 잘 알고있는 나무의 성장에 대해, 함께 먹은 빵의 맛에 대해, 지금의 순간의 감정과 나라는 개체의 표현을 주저하지 말아야 함.
생활궤도가 불쾌하고 음울한 것 또한 피해야 함. 마술사를 만나지 말것
정신집중은 처음에는 어려운 작업. 인내가 필요함.
이를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민감한’ 태도가 필요함. 이는 불안과는 다름
민감하고 반응적이라는 것은 의미있는 신호를 포착할 수 있는 ‘균형 상태’에 있는 것임. 피곤하다, 우울하다를 알고 있는 우리는 그것에 빠지는 대신 왜 나는 우울한가? 왜 피곤한가? 라는 자신과의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함.
● 동시에 스스로에 관한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함. 나 스스로 약속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자기 자신이 사랑을 할 줄 아는 존재임을 믿어야 하며,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존재임을 믿는 신뢰성이 스스로에게 필요함.
이러한 신앙은 ‘인류’에 관한 신뢰와도 직결됨. 인간이 평등하고, 정의로우며, 사랑의
원칙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신뢰감이 나를 향하는 방향과 세상을 향하는 방향 모두
균형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음.
이러한 믿음을 위해서 우리 모두는 ‘용기’, 고통과 실망 조차도 받아들일 준비가 필요함. 허무주의가 아닌 사랑을 위해 모든것을 걸고, 그 힘을 위해 아픔을 인내하고 믿을 필요가 있음.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보증 없이 자기 자신을 맡기고 우리의 사랑이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불러일으키리라는 희망에 완전히 몸을 맡기는 것을 뜻함. 사랑은 신앙의 작용이며 신앙을 갖지 못한 자는 거의 사랑하지 못함.
● “사랑은 활동이다. 내가 사랑하고 있다면, 나는 그나 그녀만이 아닌 사랑받는 사람에 대해 끊임없이 적극적 관심을 갖는 상태에 놓여있다. 내가 게으르다면, 나는 사랑받는 사람과 능동적으로 관계할 수 없다.”
● 사회는 인간이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아는 방법과, 그의 사회적 존재와 분리되지 않고 일체를 이루는 방식으로 조직되어야함. 개인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사랑의 문제는 어찌보면
사회의 사랑의 결핍일 수 있음.
사랑은 언제까지나 인간의 기본적 욕구이기 때문에, 이를 논하는 것은 ‘설교’가 아님.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을 통해 ‘사랑의 기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개인적 측면으로나, 사회적 측면에서나 의미있는 성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