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브라이언 헤어).

2022 01 09

발제자: 조현준

E pluribus unum . 여럿이 모여 하나로

심리학자 에런슨은 학급 내 인종차별을 막기 위해 직소모형을 개발하여 협력적, 상호의존적 수업방식을 실행함. 그 결과 아이들은 인종에 관계없이 협력과 수업에서의 목표달성을 위해 적극적이게 되었음.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두가지 키워드는 적자생존과 자기가축화.

과거 다윈이 적자생존에 관해 이야기했을때, 생존 가능한 후손을 남기는 것에 대한 좁은 의미의 단어였으나, 이것이 확대 해석 되어 대중에게는 더욱 강하고, 공격력이 높은, 힘이 센 종만이 살아남는 것으로 오인되어있음.

다윈 본인도 “자상한 구성원들이 가장 많은 공동체가 가장 번성하여 많은 수의 후손을 남긴다”고 이야기했지만, 대중의 상상과는 다르게 적자생존의 말로서만 각인되어있음.

협력은 단순한 상호 친밀성이 아닌 그것을 넘어선 전략적 가치가 존재함. 호모에렉투스는 탐험가이자 용맹한 전사였음. 네안데르탈인은 우리보다 머리(뇌)가 컸으며 근육질의 몸이 빙하기로부터 그들을 보호했음. 그러나, 결과적으로 생존한 것은 호모 사피엔스. 저자는 그 이유를 복합적 기술의 발전이라고 보고 있음.

혁명이라고 불리는 것은 단순한 기술의 발전이 아닌 복합적 기술의 결합. 상상력으로부터 시작됨. 호모 사피엔스는 위험을 상상하고 대비하는, 태도와 기술의 발전, 추론이 가능한 종이었음. 우리가 잘 알 듯이 움막에 모여살고, 불구덩이와 화덕을 만들어 모여사는 집단은 호모 사피엔스가 유일함.

친화력은 자기가축화를 통해 진화됨

가축화는 얼굴형, 치아크기, 신체부위 등에서 나타나는데 자기가축화는 타인과의 협력, 소통능력 또한 발전시킴.

자기 가축화는 무엇인가?

자기 가축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 인간이란 존재의 자기가축화는 스스로의 발전을 이끌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가 아닌 다른 집단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반대하거나, 상대의 집단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여김.(비인간화) -우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관용적인 동시에 가장 무자비한 종이다-

Ex) 워싱턴의 정치문화, “민주주의 체제 아래서 정치적 경쟁자들은 서로를 적으로 만들기보다 교제함으로서 발전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협상과 신뢰가 가능해진다”

인간의 인지능력에 대하여

인간은 누군가의 손짓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 이것은 마음이론이라고 불림.(우리는 이 능력 때문에 존재하며, 타인과 협력, 소통할 수 있음.)

인간은 협력과 의사소통이 둘다 가능함. 그러나 비슷한 종 침팬지는 협력 또는 의사소통 둘중 하나만 가능함.

그러나 개는 그것이 가능함. 실험에서 개가 협력적 의사소통에 특화된 인지능력이 있다는 가설이 증명됨. 개와 사람은 협력적 의사소통이 가능한데, 인지능력이 생식의 성공을 촉진하도록 진화했는데, 개는 우리와 어떻게 의사소통하냐에 생존이 달려있기 때문에 인지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 필수였음(가설).

그렇다면 개가 가축화 되는 과정에서 인지능력을 유발한 어떤 것이 있었을까? 라는 질문.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의 진화를 만들어낸 동력이 무엇인지 밝혀낼 수 있을까?

실험 과정 생략, 핵심내용은 인간에게 친화적인 동물이 더 높은 번식성공률을 보일때 가축화가 발생한다는 공식이 존재한다.

두려움을 매력으로 대체함으로써 생존하는 데 사람을 활용할 수 있다면 어떤 동물이라도 살아남을 뿐 아니라 번성하게 될 것이다.

보노보는 함께 움직이는 암컷 연대가 있는데, 덩치가 수컷이 커도 함께 움직이는 암컷들의 무리에 의해 제압당함. 보노보는 침팬지와 다르게 무리 안의 존재에게 음식을 나눠줄 수 있는 능력이 있음.

사람도 자기가축화 한 종인가?

개와 보노보를 통해 인지능력의 진화가 자기가축화, 협력에서부터 이루어짐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인간은 어떻게 변화하는지 마음이론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음.

마음이론의 또다른 섬세한 능력은 누군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틀린믿음(False Belief) 능력임. 4세 이전에는 활성화되지 않는데, 틀린 믿음 능력이 빠르게 발달할수록 언어 발달도 빨랐음. 틀린 믿음 능력이 있을수록, 과한 감정반응이 나타나지 않음. 우리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상대의 잘못을 이해하는 능력이 발달될수록, 포용력도 늘어남을 의미했고, 이는 자제력과도 연관이 깊음. - 이 말은 인간이 번식을 위해 상대방의 잘못을 포용하는 방법을 배웠다는 ‘인간의 자기가축화’와 맥락을 같이함.

그렇다면 보노보는 왜 운전하지 않는가? 왜 인간만 이렇게 되었는가?

이 질문에 관해 사람의 자제력이 가장 강한 가설을 지닌다. 마시멜로 이야기는 단순한 경제개념이 아닌 인간의 발전과 연관이 깊음. 사람은 자제력이 강화되며 마음이론, 계획수립, 추론, 언어등의 초강력 인지능력과 복합적 문화전통, 공동체 등이 형성됨.

결과적으로 사회연결망이 형성되었고, 피드백 순환고리를 통해 더 나은 기술의 진보로 이어짐. 인구밀도가 높은 집단은 복합적 의사소통을 통해 기술을 한층 더 발전시킬 것임.

이는 사람의 자기가축화 덕분에 가능했던 것. 우리 종이 번성한 것은 지능이 높아서가 아니라 친화적으로 진화되었기 때문.

Ex) 눈은 원래 다른 생물들은 위장형, 그러나 우리는 광고형 눈을 가지고 있음. 이는 특수한 경우이지만 우리는 하얀 공막을 선호하는 유일한 종.

그렇다면 우리는 친화력의 상승이 자기가축화를 이루어 낸다는 것을 이해함. 그렇다면 변화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이는 아기를 관찰함을 통해 나타남. 생후 7개월의 아기는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소개하는 음악을 선호함. 아이는 자기와 같은 집단이라고 생각하는 타인에게 더 관대했음.

여기서 중요한점은 집단이라는 단어의 정의가 고정되어있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임. 무엇이 집단의 정체성을 구성하는지는 사회의 맥락과 정의에 따라 다르게 변함(이는 인류의 집단 정체성이 무엇을 바라보는가, 무엇을 원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

실제 타인을 만날때 호의적 옥시토신이 분비되는 것, 자제력을 가지게 되는 종은 우리가 유일했는데, 우리는 낯선이에게, 동시에 우리와 같은 종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을 주저하지 않게 됨. “전쟁의 법칙은 깨졌고, 우리는 전쟁을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런 낙관적 사고와 현실을 충돌함. 앞서 이야기했듯 우리의 협력적 의사소통과 잔인함은 공존하고 있음.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조화시킬 것인가?

개와 보노보는 자기가축화를 통해 친화력을 강화했으나 두 종 모두 자신의 가족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에 대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공격성을 발달시킴.

엄마에게 존재하는 포옹호르몬은 엄마가 아이를 분만할 때 생기는 긍정적 호르몬임과 동시에 위협을 받을때 발생하는 호르몬임.

유대가 강해지면 서로를 가족처럼 느끼게 됨. 그러나, 자기가 속한 집단의 구성원을 제외하고는 위협을 느끼고 비인간화 하게 됨.

즉, 우리는 모두 편견, 맹목적으로 타인을 비인간화 하기도 함.

Ex) 미국인들의 설문조사에서 이슬람, 흑인, 이민자, 동양인을 덜 진화된 사람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잔인함은 평범한 사람이 잔인한 행동을 했을때 그 결정에 대한 공동 책임을 질때 더욱 잔인함이 쉽게 용인됨을 이야기하는 실험 결과가 존재함.

밀그램의 권위에 대한 복종실험. 우생학.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아하나?

집단간의 갈등은 실로 존재하는 문제, 이 부분은 단순한 과학적 맥락이 아닌 사회적 맥락에서의 문제의 해결이 존재함.

결론: 인간의 자기가축화 가설은 우리가 왜 친화력을 선호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예.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타인을 비인간화하는 잔인성을 지니고 있음.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집단간의 접촉, 접촉면을 많이 형성해내고, 기회를 창출할 필요가 있음. 이는 협력적 태도의 확장과 집단간 화해를 이루어 낼 수 있을것임.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닌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함.

질문:

누군가를 설득하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감은 개인의 세계가 확장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음. 그 속에서 우리는 좁아질것임. 타인을 이해하고, 나를 돌아봄으로서 완성되는 것이 스스로의 세계의 확장이라고 할때, 우리는 서로다른 집단 또는 타인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임. 세상에는 우리의 잔인함을 더욱 강화시키는 타 집단에 대한 분노가 존재함.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원하는 것은 타 집단간의 화해인가? 정복인가? 이 상황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설득과 화해, 협력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 그것을 바탕으로 같은 현실의 모습을 재구성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것 또한 태도에 달려있음. 현실의 암울함을 보느냐, 가능성을 보느냐는 미래가 어떻게 변화하고 싶은지를 결정하는 근본적 태도가 될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