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이르는 병

쇠렌 키르케고르


많은 사람들에겐 아마 이 ‘논술’ 형식이 이상하게 생각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교화적인 것이 되기에는 너무 엄밀하고, 또 엄밀하게 학문적인 것이 되기엔 너무 지나치게 교화적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적인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이 교화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교화적이 아닌 듯싶은 학문의 존재는 그 이유만으로도 비그리스도교적인 것이다. (p.177)

그리스도교적인 영웅주의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이 되려고 하는 것, 다시 말해서 한 사람의 특정한 단독적인 인간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신 앞에 혼자서 서는 이 인간은 크나큰 노력을 하고, 크나큰 책임을 지면서 오로지 혼자 서 있으려고 하는 것이다. (p.177-178)

이 글의 제목으로 알 수 있듯이 절망이란 것은 이 책 전체를 통해 병이라고 해석되고 있지, 약으로서 해석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나는 여기서 분명히 해두고 싶다. 즉, 절망은 그만큼 변증법적으로 명증하다. 동시에 또 그리스도교의 말로서는 죽음이라는 것은 최대의 정신적 비참함을 뜻한다. 하지만 구원은 죽는 것 안에, 즉 서서히 죽어가는 것 안에 존재한다. (p.178)

서론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요한복음> 11장 4절) 무덤 가까이에 이른 그리스도가 소리 높여 “나사로야, 나오라”(<요한복음> 11장 43절) 외침으로써, 이 병은 죽음에 이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확실해 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부활이요 생명”(<요한복음> 11장 25절)이신 그리스도가 무덤에 가까이 걸어갔다는 것만으로도 이 병이 죽음에 이르지 않음을 뜻하고 있지 않겠는가? 그리스도가 그때 거기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 병이 죽음에 이를 수 없음을 뜻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p.181)

그리스도교적인 의미에서의 죽음은 절대로 모든 것의 최후가 아니며, 죽음은 또한 모든 것을 포함한 영원한 생명의 내부에 존재하는 하나의 작은 일에 불과하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적인 의미에서는 죽음까지도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인간인 한은 도저히 알 수 없는 비참함이 현실에 있음을 발견했는데, 이 비참함이 바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인 것이다. (p.182)

자연 그대로의 인간도 어린애와 마찬가지로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무서운 것을 피해 있다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무서워해야 하지 않을 것을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p.182-183) 그러나 그리스도 교인이 배워서 터득한 무서워해야 할 것이란,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p.183)

제1편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절망을 말하는 것이다

제1장 절망이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A. 절망은 정신에 있어서의 병, 자기 자신에게 있는 병으로서, 거기에는 세 가지 경우가 있다. 절망에서 자신이 자신의 소유자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즉, 비본래적인 절망). 절망해서 자기 자신이고자 바라지 않는 경우. 절망해서 자기 자신이고자 바라는 경우. (p.185)

인간이란 정신이다. 그러나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이란 자기다. 그러나 자기란 무엇인가? 자기란 자기 자신과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이다. 혹은 그런 관계에 있어서의 그 관계가 또 그 자신에게 관계한다는 것을 말한다. 자기란 관계 그 자체가 아니고, 관계가 그 자신에게 관계

‘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유한성과 무한성의 종합이요, 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종합이요, 자유와 필연의 종합이다. 종합이라는 것은 둘 사이의 관계를 뜻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인간은 아직 자기가 아니다. (p.185)

절망의 분해(부조화)는 단순한 분해가 아니고, 그 자신에게 관계하는 동시에 타인에 의해 조정되어 있는 관계의 분해이다. (p.186)

즉 절망에서 완전히 벗어난 경우의 자기 상태를 나타내는 정식(定式)은,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관계하면서 자기 자신이고자 할 때 자기(정신)는 자기를 조정한 힘 가운데에 투명하게 근거를 두는 것이다. (p.186-187)

B. 절망의 가능성과 현실성

절망은 장점일까? 그렇지 않으면 단점일까? 변증법적으로 말해서 확실히 절망은 그 어느 쪽도 다 갖고 있다. … 이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인간은 정신이라고 하는 무한히 고귀하고 숭고한 정신의 소유자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절망하고 있다는 것은, 최대의 불행이요 비참함이 뿐만 아니라, 그것은 파멸이다. (p.187)

따라서 절망에 관해서는 현재 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상승인 것이다. … 만일 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다만 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일 뿐, 그 이상의 의미도 그 이하의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이야말로 절망하고 있는 것이 된다. 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절망하고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즉, 절망의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개입된 것)의 부정이어야 한다. (p.187-188)

절망이란 종합(정신에 의한 마음과 육체의 종합)인 인간 그 자신에 대한 관계안에서 일어나는 분열이다. 그러나 종합 그 자체는 분열이 아니고, 그것은 단순한 가능성에 불과하다.

관계가 정신이자 자기이기 때문에 책임이 생기게 되는데, 모든 절망은 이 책임 아래에 있는 것이고, 절망이 있는 한 그 모든 순간은 이 책임 아래에 있는 것이다. (p.188)

절망의 모든 현실적 순간은 가능성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다. 절망하는 이는 절망하고 있는 순간마다 절망을 스스로 계속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절망은 끊임없이 현재라는 시간에서 생겨난다. 절망의 현실적인 모든 순간에 있어서 절망하고 있는 자는 모든 앞서가는 것을 현재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절망한다는 것이 정신의 규정으로서 인간 속에 있는 영원한 것(영원성을 현재의 시간 속에 표현하는 것)에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원한 것에서 인간은 절대 벗어날 수 없다. (p.189)

그리고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서 탈피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자신에 대한 관계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 자기란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이기 때문에 이는 결국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p.190)

C.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지상적이고 육체적인 그 어떤 병도 죽음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확실히 병의 최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p.190)

죽음을 희망으로 생각하게 될 정도로 위험이 클 때, 그때의 절망이 바로 죽을 수조차 없다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절망인 것이다. 이 최후의 의미에 있어서의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자기 자신에 의한 이 병은 영원히 죽는, 죽으면서도 죽지 않는, 죽음의 고뇌에 찬 모순이다. (p.191)

절망의 죽음은 끊임없이 생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절망하는 사람은 죽을 수가 없다. … 절망의 “구더기는 죽지 않고, 그 불은 꺼지지 않는”다. 절망이라는 것은 스스로가 바라는 것을 이룩할 수 없는 무력한 자기를 녹여 없애는 것이다. … 끊임없이 자신의 내부를 향해 파고 들어가 점점 더 무기력해지는 자기 소모이다. (p.191).

절망하는 자가 무슨 일에 대해 절망했다는 것은 사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 “제왕이냐, 아니면 무(無)냐?” 그는 사실 자기가 제왕이 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절망하고 있는 게 아니라, 제왕이 되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p.192)

자기에 대해 절망하는 것, 절망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것, 이것이 모든 절망의 공식이다. (p.193)

절망은 절망하는 사람이 자기(정신)를 녹여 없앨 수 없다는 데서, 그것이 곧 절망에 있어서의 (죽을 수 없는) 모순의 고뇌라고 하는 데서, 인간 내부의 영원한 것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 인간의 내부에 아무런 영원한 것이 없다고 한다면, 인간은 결코 절망할 수 없을 테고, 또 절망이 절망하는 사람의 자기를 녹여 없앨 수가 있었다고 한다면, 절망이라는 것도 이미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p.194)

죽음은 병의 결말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끝없이 이어지는 최후인 것이다. 죽음에 의한 이 병으로부터의 구원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절망에 있어서의 인간의 상태이다. (p.194)

제2장 이 병(절망)의 보편성

인간은 하나의 병, 즉 정신의 병을 갖고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병이 때때로 어느 순간에 전광처럼, 자기 자긴도 모르는 불안으로 말미암아, 또 그런 불안을 동반하고서, 그 병이 내부에 있음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p.196)

사람이 절망하고 있다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이 진실로 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매우 드문, 희귀한 일인 것이다. (p.197)

절망의 경우에는 (병과는) 사정이 다르다. 절망이 나타나자마자 그 사람은 지금까지 절망하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 구원되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절망하고 있었다, 또는 아니다라고 단언할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절망에 이르게 한 바로 그 순간에 비로소 그가 과거의 모든 생애를 통하여 절망하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p.199)

절망은 정신의 한 규정으로서 영원한 것이 관계되어 있고, 그 때문에 그 변증법 가운데 영원한 것은 어느 정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p.199)

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오히려 절망하고 있음을 듯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또 절망하고 있는 상태로부터 구원되어 있음을 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p.199) 스스로는 절망하고 있다고 아무런 가장도 하지않고 솔직히 말하는 사람 쪽이 자신은 절망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보다도 변증법적으로는 한 걸음 더 구원에 가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고, 정신이고, 또 정신이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지 않은 채 그날그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안심하고 생활하며 인생에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절망이다. (p.201)

아아, 이처럼 개인의 절망이 은폐되어 있다는 것은, 모든 것 가운데서 가장 무서운 이 병과 비참함을 더욱 무서운 것으로 만드는 이유가 된다. (p.202)

그대는 절망하고 살아왔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그대는 그대가 절망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살아왔는가, 아니면 이 병을 마치 죄 많은 사랑의 과일을 그대 가슴 속에 감추듯이 비밀로 간직한 채 살아왔는가, 또는 절망 속에서 미쳐 날뛰어 다른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면서 살아왔는가. (p.203)

영원은 그대를 모른다. 즉 영원은 근본적으로 그대를 모른다. 그러나 더 무시무시한 점은, 알려져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영원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영원은 그대를 그대의 자기와 함께 절망 속에 굳게 붙들어 매고 있는 것이다. (p.203)

제3장 이 병(절망)의 여러 형태

절망은 의식이라는 규정 아래에 고찰되어야 한다. 절망이 의식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절망과 절망 사이의 질적인 차이인 것이다. (p.203)

A. 절망이 의식되어 있느냐 하는 점이 반성되지 않고 고찰된 경우의 절망. 따라서 여기서는 종합의 여러 계기만을 문제로 삼는다.

a. 유한성과 무한성의 규정 아래에서 고찰된 절망

자기라는 것은 무한성과 유한성의 의식적인 종합이요, 이 종합은 그 자신에게 관계되는 것이다. (p.204)

자기자신의 발전은 자기의 무한화에 있어 자기 자신으로부터 무한히 떨어져 나가고, 그리고 유한화에 있어 자기 자신에게 무한히 되돌아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자기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 경우, 자기가 그것을 알고 있든 없든 상관없이 자기는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p.204)

1) 무한성의 절망은 유한성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무한성의 절망은 공상적인 것, 한계가 없는 것으로서, 자기는 정말 절망했다고 하는 그것 때문에, 투명하게 신 안에서 자기 자신의 근거를 찾게 되는 경우에만 비로소 건강하며 절망에서 해방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p.205)

인간은 공상적인 감정, 공상적인 인식, 공상적인 의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공상적인 것은 일반적으로 인간을 무한한 것 속으로 끌고 나아가서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을 방해한다. (p.205-206)

감정이 공상적이게 되면, 그는 어느 정도 무한하게 되지만, 점점 더 자기 자신이 되는 것 같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더욱 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한, 인식의 상승 정도는 자기 인식의 정도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인식이 상승하면 할수록, 또 일종의 비인간적인 인식이 상승하면 할수록 더욱더 비인간적인 인식이 되고, 이 비인간적인 인식을 획득하기 위해 인간인 자기가 낭비된다. 의지가 공상적이 되는 경우 의지는 점점 추상적인 것이 되고 점점 구체적이 아닌 것으로 된다. 의지와 계획과 결의에 있어서 무한하게 되면 될수록, 의지는 그만큼 점점 더 지금 즉시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의 자질구레한 것들 속에 있으면서도, 무한성에만 정신이 팔려 언제나 그것과 같이 있게 되어 버린다. (p.206)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최대의 위험이 세상에서는 마치 아무것도 아닌 양 매우 조용히 행해지고, 거기에는 또한 상실감도 없다. 다른 것이라면 팔 하나, 다리 하나, 아내, 또는 그의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잃어버렸을 때는 곧 알게 되면서도 말이다. (p.207)

2) 유한성(현실성)의 절망은 무한성(가능성)의 결핍에 있다.

무한성의 결핍이라고 하는 것은 절망적인 편협함과 고루함을 말한다. 고루한 절망의 상태는 원시성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의 원시성을 버리고 있는 것, 정신적인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거세하고 있는 것이다. (p.208) 다른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있는 편이, 즉 원숭이처럼 흉내나 내며 있는 것, 다시 말해 많은 사람들 가운데 평범한 하나가 되어 섞여 있는 편이 훨씬 마음 편하며 안전하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세상은 그들을 절망하고 있다고 보기는커녕 흔히 그렇듯 인간다운 인간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내면을 향해 방향을 취하여 외부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그런 온갖 잘못과 죄를 무엇보다도 두려워하는 것이다. (p.209)

그러나 그들은 그들 자신이 아니다. 그들이 그 밖의 점에서 아무리 자기중심적이라고 하더라도 정신적인 의미에서의 자기를 그들은 가지고 있지 않다. 정신적이기 때문에 그들의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자기, 즉 신 앞에서의 자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p.210)

b. 가능성과 필연성(명증성)의 규정 아래에서 볼 수 있는 절망.

1) 가능성의 절망은 필연성의 결핍이다.

자기는 가능태로서 필연적인 것인 동시에 가능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물론 자기 자신이지만, 또 장차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할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능성이 필연성을 뒤로 하고 혼자서 독주하면, 자기는 가능성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하여 자기가 돌아가야 하는 필연적(명증적)인 것을 갖지 못하게 되는데, 이것이 가능성의 절망이다. 자기는 추상적인 가능성이 된다. (p.211)

여기서 자기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현실성이다. 그러나 더 자세히 보면 그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은 사실 필연성이다. … 거기에 결핍되어 있는 것은 사실 복종하는 힘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 자기 속에 있는 필연적인 것(이것은 자기 한계라고도 불러야 할 것이지만)에 머리를 숙이는 힘의 결핍인 것이다.

불행은  그가 자기 자신을 의식하기에 이르지 않았다는 것, ‘그’의 자기가 전적으로 규정된 어떤 것이며, 따라서 필연적이라고 하는 점에 그의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 불행이다. (p.212)

2) 필연성의 절망은 가능성의 결핍이다.

믿는 자는 인간적으로 말하면 자기가 파멸할 것임을 알아챈다. 그러나 그는 믿는다. 그 때문에 그는 파멸하지 않는다. 믿는 자는 어떻게 해서 자기를 구원될 것이냐 하는 것을 완전히 신에게 맡긴다. 그리고 신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자신의 파멸은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적으로는 그것이 자기의 파멸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계속 가능성을 믿는다는 것, 이것이 곧 ‘믿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 또한 그를 구원해 준다. (p.215)

믿는 자는 절망에 대한 영원히 확실한 해독제를 소유하고 있다. 그것은 가능성인데, 신들에게는 모든 순간에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앙이 주는 건강이요, 이 건강이 모든 모순을 푸는 것이다.

가능성을 결핍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 있어 모든 것이 필연적인 것이 되었다는 의미이거나, 아니면 모든 것이 일상의 다반사로 되었다는 의미이다. 숙명론자는 절망하고 있고, 신을 잃어버렸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다. (p.216-217)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신, 자기(정신), 가능성이 존재해야 한다. 자기와 깊은 의미에서의 가능성이 함께 존재해야 한다. 그러므로 신의 의지가 인간에게 실현 가능성이 있음으로써만 우리는 자기에 대해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p.217)

B. 의식이라는 규정 아래에서 볼 수 있는 절망

의식의 정도가 상승하는 것과 비례해서 절망의 강도도 끊임없이 상승한다. 다시 말해 의식이 증가하면 그만큼 절망의 강도도 강하게 되는 것이다. … 절망의 최고도는 일종의 순진성으로 인해 그것이 절망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p.218-219)

a. 자기가 절망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절망 또는 자신이 자기라는 것을, 영원한 자기를 가지고 있음을 모르는 절망의 무지.

진리는 그 자신과 허위를 구별짓는 지표다. 그러나 진리의 독선은 물론 사람들에게 그다지 주의를 끌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진실한 것과의 관계, 즉 자기가 진실한 것과 관계를 가지고 있따는 것을 결코 최고의 선으로 생각하지 않고, 또 오류 속에 있디는 것을 소크라테스처럼 최대의 불행 속에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p.219)

무지는 절망의 가장 위험한 형태일 수 있다. 무지하기 때문에 절망자는, 이것이야말로 그 스스로의 파멸이지만, 절망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어떤 작용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절망의 수중에 몸을 맡긴 채 아주 안심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절망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을 때, 인간은 자기를 정신으로 의식하는 상태에서 가장 많이 멀어져 있다. (p.221)

b. 자기가 절망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절망. 이 절망은 인간 자신이 어떤 영원한 것을 간직하는 자신을 가지고 있음을 자각하고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고자 원하지 않는가, 아니면 절망하고 자기 자신이고자 원하는가의 그 어느 한쪽이다.

1) 절망해서 자기 자신이고자 원하지 않는 경우 - 취약함의 절망

제1의 형태의 절망은 이른바 여성의 절망이고, 제2의 형태는 남성의 절망이다. (헌신은 여성이 가지는 유일한 것이다. 그래서 자연이 여성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는 것이다. 그런데 헌신이 여성의 본질이라는 것은 절망에도 나타난다. 헌신에서의 여성은 자기 자신을 잃고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만이 여성으로서는 행복한 것이도, 이렇게 함으로써 여성은 자기 자신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남성은 여성이 또 다른 의미에서 하는 것처럼, 헌신에 의해서 자기를 헌신하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가지고 있다. 남성은 헌신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남성의 자기는 헌신하고 있다는 것을 냉정한 의식으로 끝내 나중에까지 마음속에 남겨두는 것이다.)

① 지상적인 것(세속적인 것)에 대해서, 또는 지상적인(세속적인) 어떤 개별적인 것에 대한 절망

이것은 순수한 직접성(외적영향)이다. 절망은 단순한 수난이고 외부로부터의 압박에 굴하는 것이지 내부로부터 행동으로 나타나는 일은 없다.

직접적인 인간은 단순히 심정적으로 규정되어 있을 뿐이다. 자기는 원망하기도 하고, 욕구하기도 하고, 향락하기도 하면서 다른 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태도는 언제나 수동적이다. (p.227) 그래서 욕구하는 경우에 있어서조차 이 자기는 마치 어린애가 무엇을 가지고 싶어 할 때, ‘나에게’라고 하는 그 ‘나에게’와 같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입장인 것이다. (p.228) 자기는 자기 속에 반성(성찰)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절망으로 떨어뜨리는 것은 외부에서 와야 한다.

지상적인 것을 잃는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절망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문제로 삼는 것은 바로 그것이고, 그것을 그는 절망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그는 절망도 아닌 것을 가리키면서 자기는 절망하고 있다고 설명하지만 그 사이, 그가 모르는 사이에 그의 배후에서는 절망이 정말 어김없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p.228)

그런데 그들의 생활 가운데서도 그들이 내면으로 방향을 잡는 순간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대개 제1의 첫 번째 난관 근처까지 가게 된다. 그러나 거기서 방향을 바꿔 버린다. (p.235)

절망은 청년들에게만 나타나는 게 아닌 것이다. (p.236) 청년이란 미래 속에 현재(현재가 될 미래)를 두듯이 미래의 것에 대해 절망한다. 거기에는 그가 자기 몸에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미래의 것이 있어서, 그 때문에 그는 ‘그’ 자신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노인은 과거 속에 현재(현재가 된 과거)를 두듯이 과거의 일에 절망하지만, 그 과거의 일은 점점 더 과거의 일로 끝나지 않는다. 이유인즉, 노인은 과거의 일을 아주 잊어버리고 말 수 있는 식의 절망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p.238)

따라서 자기는 우선 개인의 현실적인 상실을 무한히 높이고 숨겨서 지상적인 것 전체에 대해 절망하는 것이다.

② 영원한 것에 대한 절망,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

절망자는 지상적인 어떤 것(개인적인 것)에 대해 절망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자신이 그것에 대해서만 절망하고 있다고 언제나 말하지만, 그러나 사실 그는 영원한 것에 대해 절망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우선 지상적인 어떤 특정의 것을 모두 지상적인 것처럼 만든 뒤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영원한 것에 대해 절망하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상승이 있다. 우선 먼저 자기에 관한 의식의 상승이 있다. 왜냐하면 자기 속에는 영원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또는 자기는 자신의 내부에 영원한 어떤 것이 있다는 자기 관념이 없다면, 영원한 것에 대해 절망한다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만일 사람이 자기 자신에 관해 절망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물론 사람이 자기 내부에 자기가 있음을 의식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여기에서의 절망은 가장 진실의 절망으로서, 영원한 것과 자기 자신을 잃는 절망이기 때문이다. 이 절망은 보다 더 강도가 있는 것이므로 어떤 의미에선 구원에 더욱 가까이 가 있다. 그런 절망은 너무나도 깊은 것이기에 거의 잊어버릴 수가 없다. 그러나 그렇기에 이 절망이 입을 열고 있는 순간순간에 구제의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p.240)

이러 절망 상태의 자기야말로 정말 철저하게 안 보이는 장막(최초의 자기를 철저히 가리는 절반의 회귀)이며 그 배후에 자기가 앉아서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자기 자신이 아니고자 하는 데 시간을 보내느라 열심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밀폐라고 부른다. 이것은 직접성(외적영향)의 정반대이며, 특히 또 사고 방식으로 볼 때에는 직접성에 대해 크게 경멸하는 생각을 품는 것이다. (p.241)

이 틀어박혀 밀폐되어 있는 절망이 절대적으로 모든 면에서 완전히 유지될 경우, 그에게는 자살이 가장 가까이 다가서는 위험이 될 것이다. (p.245)

2) 절망해서 자기자신이고자 욕구하는 절망 - 반항

최초에 지상적인 것(전체적인, 일반적인 것), 또는 지상적인 어떤 것(개별적, 개인적인 것)에 관한 절망이 있고, 다음으로 영원한 것, 자기 자신의 본질적인 것에 관한 절망이 온다. 그런 다음에 반항이 나타난다. 이것은 영원한 것의 힘을 의식한 절망이기 때문에, 이 반항은 절망해서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그런 자기 속의 영원한 것을 절대적으로 남용하는 것이다.

반항에 있어서의 자기는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것에서 시작하려 하지 않고, 지상적인 자기 자신이고자 바라는 것이다. (p.246) 자기는 절망적으로 자기 자신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려 들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을 창조하며, 자신의 자기를 그가 ‘존재하고자’ 바라는 대로의 자기로 만들어 냄으로써, 자신의 구체적인 자기 속에 가지고 싶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스스로 결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생성된 자기를 만들어 내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그는 그런 자기 자신이고자 바라는 것이다. 자기는 자기 자신이고자 바라는 절망적 노력을 하면서 도리어 정반대의 것을 향해 노력하게 되어, 그것은 사실 자기가 되지 않는 것이다. (p.247-248)

절망해서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이 같은 고뇌자 속에 의식이 더하면 더할수록 절망의 강도도 강해진다. 그는 결코 그 구원의 손을 잡지 않는다. 이미 때가 늦었다. 고통을 자기 수중에 넣어두어 그것을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p.251) 즉, 그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악마적인 무한한 우월감으로부터, 그가 현재 있는 그대로의 ‘그’이고자 하는 악마적인 의미의 권리로부터, 영원히 멀어지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무한한 추상화를 갖고 시작했다. 그런데 드디어 지금은 이 추상적 의미에서 영원이 되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구체적으로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그는 절망적으로 여전히 구체적 자신이고자 바라는 것이다. 아아, 이 얼마나 악마적인 광기라고 할 것이가!

그러나 절망이 정신적인 것으로 되면 될수록, 내면성이 자기만의 독자적 세계로 특어박히는 상태가 되면 될수록, 절망이 몸을 숨길 수 있는 외관(외적 타락)은 점점 더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되어간다. (p.252) 외면 아래 깊숙이 사는 것이 더욱 중요해지게 되는 것이다. 현실의 배후에 있는 하나의 밀폐된 방, 사람들을 모두 내쫓고 자기 혼자만 있을 수 있는 세계, 절망한 자기 자신이고자 바라는 것을 쉴 세 없이 되풀이 하고 있는 탄탈로스처럼 분주하게 움직일 수 있는 하나의 세계를 확보하기 위한 안전책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p.253)

제2편 절망은 죄다

제1장 절망은 죄다

죄란 ‘신 앞에서 또는 신의 관념을 갖고서 절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아니고자 바라든 자기 자신이고자 바라든 그것은 죄이다.’ 그러므로 죄란 지나치게 심해진 나약함, 또는 지나치게 심해진 반항이다. 다시 말해 죄는 절망의 강한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p.264)

A. 자기의식의 여러 단계(‘신 앞에서’라는 규정)

우리가 지금까지 문제 삼아온 자기의식의 단계는, 인간적인 자기 또는 인간을 척도로 하는 자기라는 규정의 한도 내에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자기’는 그것이 신 앞에서의 자기라는 것에 의해 새로운 성질과 자격을 얻는다. 이 자기는 이미 단순한 인간적인 자기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신학적인 자기, 신을 향한 자기라고 부르고자 하는 것이다. (p.266)

죄를 두려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죄가 신 앞에 있기에 그렇다. 그러나 이 경우 문제는 신이 뭔가 외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것과, 신에 대한 죄가 단지(법정에 서듯) 가끔 범해지는 것으로 여겨져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은, 경관과 같은 뜻의 그런 외적인 것은 아니다. (p.267)

절망의 정도는 자기의식에 비례해서 강해진다. 자기가 그러한 단독적 자기로서 현실적으로 신 앞에 있는 것을 의식할 때, 그때 자기는 무한의 자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같은 자기가 신 앞에서 죄를 범하고 의식하는 것이다.

사실 교회 이단자들의 죄는, 신에 관해, 지금 신 앞에 있다는 일에 관해 절망적 무지상태였다는 것이다. 그 죄는 “하나님도 없는 세상에 살았다”는 것이다. (p.268) 죄란 신 앞에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고자 하거나, 또는 신 앞에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 아니고자 하는 일이다.

신앙이란 자기가 자기 자신이고자 함에 있어 신 안에 투명한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p.270)

부론: 죄의 정의는 절망의 가능성까지도 지니고 있다. 절망에 대한 일반적 사변

왜 인간이 그리스도교 앞에서 좌절하는가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교가 너무 높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종종 몹시 마음 아파하면서 좌절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 훈계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시 말해 좌절의 가능성이 그곳에 있고, 또 그곳에 있기 마련임을 그리스도 자신이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p.271)

그리스도교는 가르친다. 이 단독의 인간이, 단독의 인간 각자는 지금 신 앞에 있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 그 인간이 신과 함께 아주 편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어 있다고 가르친다. 그뿐이랴. 그 인간을 위해 또 그 인간 때문에 신은 세상에 온 것이며,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 어려움을 겪고 죽어간 것이다. 이 수난의 신 앞에서 감히 그것을 믿고 받아들을 만한 겸허한 용기를 지니지 못하는 자는 누구나 좌절하는 것이다. (p.273) 왜 그는 좌절하는 것이냐하면, 신이 그에게는 지나치게 높기 때문이다. 그의 머리로는 그것을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좌절이란 무엇일까? 좌절이란(숭고한 상대에 대한) 불행한 경탄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질투와 비슷하다. 자연 그대로의 인간의 좁은 마음으로는, 신이 그에게 주고자 했던 특이한 일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좌절하는 것이다. 질투란 숨겨진 경탄이다. 경탄은 행복한 자기 상실이며, 질투는 불행한 자기주장이다. 좌절도 마찬가지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의 경탄은 질투이던 것이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는 예배, 즉 좌절이기 때문이다. (p.274)

좌절의 가능성은 아주 정당하게, 신앞에서의 좌절이라는 그리스도교적인 정의와 죄가 서로 관련되어 부여되고 있다. 그것은 ‘신 앞에서’라는 것이다. (p.275)

B. 죄의 소크라테스적 정의

죄는 무지이다. 그 무지란 근원적인 무지인가. 그것은 진리에 대해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적이 없으며 또 알 수도 없었던 인간인 상태인가. 아니면 그것은 만들어 낸 무지, 즉 나중에 생긴 무지인가를 알아야겠다. (p.277)

죄를 규정함에 있어 소크라테스에게 결여되어 있는 규정이란 어떠한 것일까. 그것은 의지 반항이다. (p.278)

소크라테스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이 내릴 수 있다. 누군가가 올바른 일을 하지 않을 경우,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난해한 문제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소크라테스적인 것이 스스로 어느 정도 그 문제점을 알고 있기에, 교정 수단을 강구하고 있는 것인데, 어떤 일을 알게된 시점에서부터 그것을 행하려는 순간으로 이르는 이행과정에 관한 변증법적인 규정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p.282)

개개인의 현실적 인간이 문제가 되지 않는 순수한 관념 세계에서도 이행이 필연적이다. 이에 반해 개개인의 인간이 문제가 되는 현실 세계에서는, 이해한 시점에서 행하는 일로 이르기에는 약간의 이행이 있을 뿐으로, 이 이행은 반드시 빠르게, 아주 빠르게, 바람처럼 빠르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p.283) 다시 말해 죄는 인간이 올바른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 다시 말해 인간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는 것이다. (p.284)

따라서 그리스도교적으로 해석하면, 죄는 인간의 의지 속에 있는 것이지 인식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의지의 타락은 개인의 의식을 넘어서 이루어진다.

“그렇다, 네가 완전함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 하는 일과 함께, 또 죄는 무엇인가, 하는 그 일이야말로 네가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보라, 이런 뜻에서 그리스도교적으로 말해 죄는 무지이다. 죄가 무엇인가에 대한 무지인 것이다.

죄란 신이 내린 계시에 따라 죄의 문제가 해명된 다음, 신 앞에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고자 하지 않는 일, 또는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일이다. (p.286)

C. 죄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것이다

죄의 규정 방법은 회개의 규정에 있어 결정적이다. 회개는 부정의 부정이어야 한다. (p.287)

나는 어디까지나 죄는 적극적인 것이라고 하는 그리스도교적인 것만을 고집한다. 그것은 개념적으로 일일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밖에 없는 신앙, 역설로서이다. 이것이 올바른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p.288)

소크라테스의 무지가 일종의 신에 대한 두려움이며 신을 받드는 일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소크라테스적 무지는 신과 인간 사이의 질적 차이를 인정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단 하나의 측면에서만 죄가 적극적(신의 계시나 역설, 신앙을 필요로 하는 죄)이라는 것을 명백히 할 수 있다. 죄는 신의 관념에 의해(신 앞에서) 무한히 그 도가 강해진 자기, 즉 하나의 행위로서의 죄에 대한 최대한의 의식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죄가 적극적임을 나타내는 것이며, 죄가 신 앞에서 있다는 것이 죄에 있어 적극적인 것이다.

죄가 적극적인 것이라는 규정은 또 완전히 다른 뜻에서의 좌절의 가능성과 역설을 내포하고 있다. 그 역설이란 속죄의 교설에서 오는 귀결로서, 속죄의 가능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p.290)

제2장 죄의 계속

모든 죄는 상태에 따라 그 하나하나가 새로운 죄이며 계속되는 그 순간순간이 새로운 죄이다. 죄 속에 있는 각 상태는 각자 새로운 죄이고 죄 그 자체이다. 영원은 단지 두 개의 공간밖에 갖고 있지 않다. 신앙이냐, 죄이냐. 즉 “신앙에 의해 행하지 않으면 다 죄가 된다.” 회개할 수 없는 죄는 그 하나하나가 새로운 죄이며 죄가 회개되지 않고 있는 순간순간이 새로운 죄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관해 연속된 의식을 갖고 있는 인간이 얼마나 희귀한지 모른다!

그러나 영원은 본질적인 연속성이며, 그 연속성을 인간에게 요구한다. 또는 인간이 자기를 정신적인 상태로 의식하고 신앙을 가져 주길 강요한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죄인은 완전히 죄의 지배 알에 있으므로 죄의 전체적인 규정 같은 것은 모르고, 자기가 파멸의 길을 헤매고 있다는 것도 전혀 알지 못한다. 죄는 그에게 매우 자연스럽다. 죄의 연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p.300)

사변적인 입장에서 보면 죄는 소극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보면, 물론 죄는 적극적인 것이며, 계속 증대하는 조정의 연속성을 자기 자신 속에서 전개해 가는 것이다. (p.301) 개개인의 죄는 죄의 반복적 연속이 아니라 어떤 죄의 계속적인 표현인 것이다. 죄 속에 머물러 있는 상태는 개개인의 죄보다 더 나쁜 죄이며, 죄 그 자체이다. 이같이 해석한다면 죄 속에 머물러 있는 상태는 죄의 계속이자 새로운 죄라고 할 수 있다.

정신의 규정 앞에 서는, 모든 실존은 일관성을 지닌다. 그것이 자기 한 개인의 책임에 관련된 일이라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자기 속에 일관된 어떤 것을 지니고 있기에 보다 높은 어떤 것 속에, 적어도 이념 속에 일관된 것을 지니고 있다. (p.302)

신앙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와 대립적인 악마적 인간도, 죄 그 자체에 잇어서의 일관성이라는 점에서 말할 수 있다. 악마적인 자로서는 그 자신에게 있어서 일관되게 악의 일관성 속에 있음으로써 전체를 상실하여야만 한다. 단지 죄의 계속 속에서만 그는 자기 자신이다. 그 속에서만 그는 살며, 그 속에서만 그는 자기 자신이라는 느낌을 갖는다. 그의 새로운 죄는 각각의 죄 속에 머물러 있던 상태의 표현에 불과하며, 죄 속에 있는 상태야말로 본래의 죄이다. (p.304)

A. 자기의 죄에 관해 절망하는 죄
죄와 절망은 같다. 그 정도가 강해진, 자기의 죄에 관해 절망하는 새로운 죄이다. (p.304) 죄 그 자체가 선으로부터의 이탈이며 죄에 관한 절망은 또한번의 이탈을 하는 것이다. 죄에 관한 절망이란 보다 더 깊숙이 가라앉음으로 해서 몸을 지탱해 보려는 시도이다. (p305)

그러나 그의 물론 죄에 대한 절망은 자기 자신의 공허함을 자각하는 데서 오는 것이고, 자기가 생명의 양식을 조금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이 자기의 관념조차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자각하는데서 오는 것이다. (p.306)

죄에 관한 절망은 자신을 과시하려는데서 온다. 그 사람이 깊이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자기의 죄에 대해 그렇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표현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기만이다. (p.307) 그런데 죄가 거듭됨에 따라 과거의 일이 갑자기 다시 현재가 되고 만다. 그의 현재의 자랑은 그 추억에 지고만다. 그러기에 그처럼 깊은 비탄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탄의 방향은 명백히 영원한 신으로부터의 이탈이며, 남모르는 자기애이며, 과거의 자신에 대한 거만이다. (p.308)

죄에 대한 그의 슬픔, 그의 한탄, 그의 절망은 자기주체적인 것이라서(죄에 대한 불안과 마찬가지로, 이 불안은 죄 없이 있는 것을 자랑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자기 사랑의 상태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종종 사람을 죄로 빠뜨린다), 위안, 그것이야말로 그가 가장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며, 그러기에 목사가 처방하는 막대한 위안의 약이 오히려 병을 악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p.309)

B. 죄의 용서에 대해 절망하는 죄(좌절)

(신의)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반항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현실적으로 그러한 자기 자신, 즉 죄인이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죄의 용서를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려 하는 것이 이 경우 또한 반항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경우라면 반항이란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고자 고집하는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것이 약함이 되므로써 절망하여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려 하는 동시에, 또한 죄의 용서 드은 잇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p.3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신은 죄의 용서, 즉 화해를 내세우는 것이다. 그런데 죄인은 절망한다. 그러므로 절망은 보다 심각하게 표현되고, 이 절망은 마침내 신과 어떤 식의 관련을 갖게 된다. 죄인이 신의 용서에 대해 절망하는 모습은 마치 그가 신에게 덤벼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죄의 용서와 같은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런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p.311) 신의 죄의 용서에 대해 절망하는 것은 죄이다.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일에 좌절하지 않기 위해서도 마찬가지고 상당한 정신 상실(약함의 절망)이 필요하다. (p.313)

사람들은 죄의 의식에서조차도 아직 이르지 않았다.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 그들의 안심이 곧 죄를 용서하는 의식이라는 망상을 한다. (p.314)

죄의 범주의 속성은 단독성이다. 죄는 사변적으로는 결코 사유될 수 없다. 다시 말해 단독의 인간, 즉, 개인은 개념 아래에 있기 때문에, 사람은 어떤 한 인간을 직접 사유할 수는 없고 단지 인간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유할 수 있을 뿐이다. (p.316)

사람은 스스로 이런 단독의 죄인인데, 단독의 죄인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인양 여겨 가벼이 행동하는 것은 새로운 죄이다. (p.317) 죄의 교설, 즉 너와 내가 죄인이라고 해석하는 교설은 ‘대중(무리)’을 완전히 분산시켜버리는 교설이다. 죄란, 바로 신 앞에서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p.318)

아무리 많은 사람이 심판을 받는다 하더라도 아마 심판을 한다는 일이 엄숙한 일이고 진실된 일이라면, 단독자 각자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므로 유죄자의 수가 대단히 많을 경우 인간의 힘으로는 판단할 수가 없다. 따라서 심판을 한다는 그 자체를 단념하게 되는 것이다. 유죄자가 너무 많아서 심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많은 유죄자를 각각 단독자로서 포착할 수도 없으며, 각각 단독자로서 포착할 방법도 모른다. 그러므로 심판이라는 것을 단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p.320) 요컨대 우리가 다수자가 되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되기만 하면 우리는 영원성을 지닌 심판인지 여부에 대해서도 안심하고 태평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영원한 세계에 도착할 때, 누구든 자기가 범했거나 게을리 했던 사소한 일까지도 빠뜨리지 않고 상세히 기록한 보고서를 스스로 지니고 가서 건네주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죄의 용서에 대해 절망하는 것은 좌절이다. 그리고 좌절이란 절망의 정도가 강화된 것이다. (p.321-322)

C. 그리스도교를 적극적으로 폐기하고, 그것을 허위라고 말하는 죄

이것은 성령에 적극적으로(역설적, 교설적, 신앙적으로) 반(反)하는 죄이다. 성령을 거역하는 죄는 좌절의 적극적인 형태이다. (p.322)

신과 인간이간, 그 사이에 무한한 질의 차이가 있는 두 가지의 다른 질이다. 이 차이를 간과하는 모든 교설은 인간적으로 말하면 광기이고, 신적으로 해석하면 신에 대한 모독이다. 이교에서는 인간이 신을 인간으로 만들지만(사람=신),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는 신이 스스로를 인간으로 만들었다(신=사람). (p.323)

인간 최대의 비참함, 죄보다도 더 큰 비참함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앞에서 좌절하여 그 좌절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 좌절은 그리스도도 그것을 불가능하도록 막을 수 없으며, ‘사랑’도 그것을 불가능하게 할 수 없다. 보라, 그러기에 그리스도는 말한다. “내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p.324)

신과 인간 사이에 무한한 질의 차이가 있다는 점, 이것이 제거할 수 없는 좌절의 가능성이다. 사랑 때문에 신은 스스로 인간이 되는 것이다. (p.325)

그러나 좌절의 가능성이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를 호위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곁에서 입을 크게 벌린 심연으로, 신과 가장 친했던 인간 사이에 엄연히 놓여 있다.

좌절의 가장 낮은 형태, 인간적으로 말해서 가장 천진스러운 형태는,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문제를 미결정 상태로 두고 그 문제에 관해 일부러 아무런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이다. 더욱이 신앙도 갖지 않고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는 일이 좌절하는 일임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 셈이다. 그리스도가 당신에게 말을 전하였을 때, 그에 관해 나는 아무런 의견도 가질 생각이 없다고 하는 것은 좌절인 것이다. (p.327)

신이 인간이 되려고 생각할 때, 인간이 그에 관해, 아니 그의 일에 관해서 나의 의견을 갖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든다면, 얕은 마음으로 경멸하고 있는 일을 그럴 듯하게 반문하는 말이며, 따라서 신을 그럴싸하게 멸시하는 것이다.

좌절의 제2형태는 부정적이되 수동적인 것이다. 이런 형태의 좌절을 하고 있는 자는 그림자처럼 살고 있다. 그의 생명은 쇠진한다. 좌절의 최후 형태는, 우리가 여기서 문제로 삼고 있는 적극적인 좌절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교를 허위와 거짓이라고 주장하고(그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것과 그가 그 말대로 존재한 분이라는 것을) 그리스도를 가현설(가상으로서의 육체에 불과하다)의 입장에서든지, 또는 합리주의 입장에서 부인하는 것이다. 좌절의 이런 형태는 성령을 거역하는 죄이다.

신앞에서의 절망이 전혀 존재하지 않은 상태가 공식이라고 정하였다. 이런 상태, 즉 신앙을 가진 상태가 자기 자신에게 관계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이고자 함에 있어 자기를 조정하는 힘에 투명한 발판이 된다고 말하였다. 이 공식은 동시에 신앙의 정의이기도 한 것이다. (p.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