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르 마네트 _ 김진명

고려 말 직지가 금속활자를 통해 인쇄된 이후, 시간이 흘러 어느덧 조선. 조선의 네 번째 왕 세종은 새로운 글자, 조선만의 글자를 만들기 위해 힘쓰고 있었다.

짐승의 서열이 이빨이나 발톱, 근력에 의해 결정된다면 사람의 힘은 지식과 지혜에 의해 결정되는 바, 백성이 책을 읽어 지식과 지혜를 얻기에는 한자라는 문자가 너무 어려웠고, 그러다 보니 학문도 지혜도 신분도 벼슬도 다 세습되고 있었다. 글과 학문을 익히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에 가난한 백성이 자식에게 글을 가르친다는 건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라 세습은 점점 굳어지게 마련이었다.

- 41-42쪽

세종은 백성들을 위해 새로운 글자를 만들고자 했고, 이를 금속활자를 통해 널리 전파하고자 했다. 한자를 모르는 일반 백성들도 지식과 지혜를 얻을 수 있길 바랐고, 모두가 힘을 가지길 바랐다. 백성을 강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근원적 방도로 새로운 글을 만들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에 모든 백성이 읽고 쓸 수 있는 새로운 글을 만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유학을 따르던 조선에서는 여러모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명나라를 섬기고 있던 조선이 한자를 쓰지 않고 자신만의 글자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명나라에 대한 반역이었고, ‘앎’으로부터 가질 수 있었던 사대부의 힘이 백성들로부터 위협받을 수 있음을 의미했다. 조선만의 글을 만든다는 것은 명나라도, 사대부도 반가워하지 않는 일이었다.

이때 세종을 도와 주자술을 가지고 있던 은수는 한글 창제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이들의 표적이 되어 쫓기게 된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선교사들과 함께한 끝에 프랑스 에비뇽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은수의 금속활자 주자술은 이곳에서도 가톨릭의 신성과 권위를 추락시킬지 모르는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때문에 은수는 자신을 도와주던 이들에게 금속활자를 알릴 것을 맡기고 침잠의 방으로 들어갔다.

“렉스 마그네, 리테라스 노바스 이얌 콘페키스티스(Rex Magne, Lotteras novas iam confecistis)?”
“상감마마, 새 글자는 완성하셨는지요?”

- 225쪽

55년 간의 긴 침묵 끝에 은수가 라벤더 꽃밭에 앉아 뱉은 말은 자신의 왕, 세종을 그리는 말이었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아니한다.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가엾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 훈민정음 언해본 中 어지(御旨, 임금의 뜻)1)

그리고 세종은 은수가 침장의 방에 들어가기 이전인 1443년, 조선만의 새로운 글자 훈민정음을 세상에 펼쳐보였다.

수많은 이들의 반대와 핍박을 거쳤지만, 세종과 은수가 품었던 새 글과 금속활자에 대한 꿈은 모두 이루어졌다. 은수가 먼 서역 땅에서도 잊지 않았던, 긴 침묵 속에서도 잊지 않았던 상감은 결국 새로운 글자를 만들었고, 은수가 전한 금속활자의 기술은 결국 구텐베르크를 통해 꽃을 피우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여느 생명체들과 달라. 이성으로 본능을 극복하여 이기심을 넘어선 이타심의 영역에 이르게 된 거야. 내가 하는 이 일은 힘들고 손해보고 심지어 희생도 따르는 일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누군가가 행복해진다면 나는 기꺼이 그 일을 하겠네. 아름답지 않은가, 인간이란 존재가?”
“행복이 무엇인가? 본능을 잘 채우는 게 행복 안인가? 식욕과 물욕과 성욕과 출세욕 같은 걸 잘 채우면 그게 행복이야. 벌레나 짐승의 삶이라면 행복한 삶이 최고의 목표겠지. 하지만 인간에겐 행복보다 불행을 택하기도 해. 그게 더 의미가 있다면.”

- 88-89쪽

자신을 양녀로 받아들이고 도피시켜준 유겸, 객주에서 불한당을 제지하던 이름 모를 노인과 손님들, 모두 자신이 힘들어지더라도 남을 위해 나서는 거룩한 이들이었고 영원히 기억에 남을 이들이었다. 은수는 목에 걸린 은십자 목걸이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목설이에 새겨진 글귀를 되뇌었다.
“템푸스 푸지트 아모르 마네트(Tempus Fujit Amor Manet)”
은수가 라틴어를 깨우치면서 이 글귀가 “세월은 흐러도 사랑은 남는다”는 뜻인 걸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이 목걸이가 모든 악귀를 물리치는 영물이라고 했는데, 결국 지금까지 자신을 지켜준 것도 사랑이었다고 느꼈다.

- 157쪽

한글과 금속활자를 통해 남겨진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이었다. 인간의 이기심을 넘어서게 만드는 이타심의 근원이 되는 사랑이 담겨있다. 백성에게도 힘이 있길 바랐던 왕의 사랑, 깊은 뜻을 가진 왕을 향한 백성의 사랑, 백성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길 바랐던 이들의 사랑이 그 속에 남겨져 있다.

사랑은 대륙을 건너 먼 서역 땅에서도, 수십년의 시간이 지나서도, 왕이 만든 글과 금속활자로 찍어낸 책 속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처절한 고통과 반대 속에서도 져버릴 수 없었던 사랑의 마음이 우리가 쓰는 이 글 속에, 읽는 책 속에 담겨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남겼다.

한글과 금속활자에 담긴 사랑의 의미를 깨달으며, 다음주엔 그로부터 이 시대에 우리가 가져야 할 정체성과 가치관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가보기로 했다.

[사진] 네이버 지식백과, 훈민정음

1) [네이버 지식백과] 훈민정음 [訓民正音] (외국인을 위한 한국고전문학사, 2010. 1. 29., 배규범, 주옥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