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은 페르소나같이 꾸밈에 있는 것으로 우리는 인격과 솔직함을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정말 나다운 나로써 살고 있을까? 칸트가 이야기하는 인간다운 인간은 무엇일까? 우리는 생각나는대로 솔직하게 감정을 이야기하고 표현하기만 하면 되는것일까? 표현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는 자유인가?

[우리는 모두 존엄을 가지고 있고, 세계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존엄한 인간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세상은 목적들의 나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써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무엇에 있으며, 우리는 목적이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야하는가?


다음과 같은 질문은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라는 두번째 질문에서 다뤄진다. 칸트의 두번째 저서 [실천 이성 비판]에서 칸트는 실천 이성 비판에서 이성을 경험세계 밖에 풀어놓음으로써 인간이 알수 있는 것과 별개로, 행해야 하는 지향점은 어디에 있는지를 묘사함으로써 순수 이성비판과의 차별점을 두고 있다. 무릇, 당위라는 것은 이상세계의 언어로써 도덕법칙, 도덕 의무에 대한 인간의 행해야 함으로 이야기되는 당위인데, 칸트에 의하면 도덕이란 인간의 이성에서 발원한다. 본래 국가 또는 신에게 있던 자율의 의미가 칸트를 통해 인간으로 넘어오면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도덕을 추구할수 있는 ‘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각각이 인격체로써 그것을 침해하지 않고 도덕의 의무를 수행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이야기한다.(158p) 그것을 통해 자기 자신을 완성시킬 의무가 있기 때문에, 칸트는 그것이 단순히 행위만이 아닌 명령 이어야 한다고까지 이야기한다.

자연에서의 법칙과 달리 명령형을 띄고 있는 도덕법칙은 칸트의 철학에서 정언명령 이라고도 불린다.(161p) 명령에 의한 나의 행동의 동기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있을때만이 그것이 도덕이 될 수 있다고 칸트는 이야기한다. 따라서 도덕은 그 자체로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강제성을 띄고 있으며, 인간이 스스로를 강제함이 곧 도덕의 완성이 될 수 있다고 칸트는 이야기한다.

칸트는 우리에게 동시에 용기를 준다.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라고 이야기하며 우리 모두가 누구라도 그것을 행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인간이 마땅히 해야할 의무는, 당연히 할 수 있다. 우리는 자유를 본래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해야할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또한 존재한다.(172p)

위와 같은 도덕 원리의 궁극은, 우리의 존엄성, 인격에서 빛을 발한다. 존엄은 대체가 안되는것이다. 존엄한 것은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교환이 이루어질 수도 없다. 인간은 그 자체가 목적이고, 목적들의 나라이기 때문에 다른사람의 인격 또한 우리가 수단으로 삼을 수 없다. 우리가 하는 공부 또한 자기 자신의 존엄을 높이는 일이어야 함을 이야기한다. 나를 다스리고 나를 알 수 있는 길이 공부의 목적이다.(179p)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나다운 나를 위해 인격을 꾸며야 하는 꾸밈 그자체의 정의도 다시 내려보게 되었다. 가식으로 가장하여 내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상태로 나를 꾸미는게 아니라, 선의지에 의해 세워진 도덕법칙이 우리의 자유와 존엄을 지켜주는 상태에서, 상대의 자유를 대할 때, 내 안에있는 도덕명령을 끊임없이 가꾸며, 상대의 자유또한 도덕법칙에 의한 존엄임을 알게 되는 것이 진정한 인격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격자는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고, 비인격자는 남을 괴롭힌다.]

우리는 존재 자체로 존엄하며,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은 우리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수단으로 삼는데 그치지 않으며, 나아가 서로를 혐오하게 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하지만, 칸트는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도덕의무를 지키라고 지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언젠간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용기를 준다. 그 용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에게는 본래 행할 수 있는 힘이 존재하는데, 그 힘은 필연적으로 우리가 행해야 하는 것을 행할 수 있게 데려다준다. 그 본래의 힘을 우리가 믿기 위해서는 공부의 목적을 자신 스스로로 삼으며, 궁극으로는 우리의 마음씨가 시간의 무한성 안에서 소멸되지 않고 존재해야 함을 이야기한다. 즉, ‘영혼의 불사성’ 만이 우리를 목적 자체인 ‘최고선’의 행복으로 데려다 준다고 이야기 하는데, ‘영혼의 불사성’을 위해서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한한 시간에 항상 존재하는 존재가 필요함을 행복의 조건으로 삼는다. 따라서, 칸트는 필연적으로 [실천 이성 비판]에서 외부의 존재자를 다시 우리에게 데려옴으로써 우리가 존엄한 존재임과 동시에 존엄하기 위해 필연적인 ‘신’의 존재를 우리 앞에 대등하게 위치시켰다.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믿음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주에 인간이란 무엇인지 최종적인 질문과 함께 나눠보기로 하며 이번주의 대화를 마쳤다.

우리는 그것을 행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해야하니까
- Schiller, Die Philosophen, Atc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