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니체

그러나 마침내 그의 마음에 변화가 왔다. …
나 이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저 아래로 내려가려 하거니와, 나 저들이 하는 말대로 너처럼 내리막길을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나는 베풀어주고 싶고 나누어주고 싶다. 사람들 가운데서 지혜롭다는 자들이 새삼스레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가난한 자들이 새삼스레 자신들의 부유함을 기뻐할 때까지.
… 이렇게 하여 차라투스트라의 내리막길은 시작되었다.

- 12~13쪽

산 속에서 자신 스스로에게 몰두해있던, 고독을 즐기던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무엇인가를 베풀고 나누기 위해 세상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느냐’라는 성자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나 사람들을 사랑하노라.”

- 14쪽

오랜 고독 끝에 사람들 만나기로 마음을 먹은, 사람을 사랑한다 이야기하는 차라투스트라의 모습을 보며 여러 질문들이 떠올랐다. 차라투스트라가 그토록 사랑으로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진심은 무엇일까? 차라투스트라가 걷는 길은 왜 내리막이었던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을 가지고 우리는 차라투스트라가 걷는 길을 따라 함께 걸어보았다.

차라투스트라가 처음으로 사람들을 만나 전한 것은 ‘위버멘쉬(Übermensch)’였다.
“나 너희에게 위버멘쉬Übermensch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 위버멘쉬에게는 사람이 그렇다. 일종의 웃음거리 아니면 일종의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이다. … 위버멘쉬가 대지의 뜻이다. 너희 의지로 하여금 말하도록 하라. 위버멘쉬가 대지의 뜻이 되어야 한다고!
형제들이여, 간청하노니 대지에 충실하라.”

- 17~18쪽

건강한 신체, 완전하며 반듯한 신체가 더욱더 정직하며 순수하게 말을 하니. 그런 신체가 이 대지의 뜻을 말해준다.

- 51쪽

형제여, 너의 생각과 느낌 배후에는 더욱 강력한 명령자, 알려지지 않은 현자가 있다. 이름하여, 자기가 그것이다. 자기는 너의 신체 속에 살고 있다. 너의 신체가 자기인 것이다.

- 53쪽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를 가르치며 대지에 충실하게, 순수한 신체로 살아갈 것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대지란 ‘현재’를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막연한 어떤 것이 아닌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는 지금, 현재. 그리고 이러한 현재를 그대로 느끼는 정직한 신체. 니체는 인간이 허상이 아닌 현재와 신체, 즉, 나 자체, 자기로서 살기를 바랐다.

너희가 할 수 있는 체험 가운데 더없이 위대한 것이 무엇이지? 그것은 저 위대한 경멸의 시간이렷다. 너희가 누리고 있는 행복이, 그와 마찬가지로 너희의 이성과 덕이 역겹게 느껴질 때 말이다.

- 19쪽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건너가는 과정도 위험하고, 뒤를 돌아보는 것도 위험하며, 벌벌 떨고 있는 것도 멈춰 서 있는 것도 위험하다.
사람에게 있어 위대한 것은 그가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사랑받을 만한 것은 그가 하나의 오르막이요 내리막이라는 것이다.”

- 20쪽

나는 사랑하노라. 깨닫기 위해 살아가는 자, 언젠가 위버멘쉬를 출현시키기 위해 깨달음에 이르려는 자를. 그런 자는 그럼으로써 그 자신의 몰락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니.

- 21쪽

보라! 나 너희에게 인간말종을 보여주겠으니. … ‘우리는 행복을 찾아냈다.’ 인간말종들은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깜박인다.

- 24쪽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를 향해 걸어가는 길이, 대지에 충실하며 자기로서 살아가는 삶이 파멸이자 몰락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파멸과 멸망은 인간이 스스로에게 가지는 부끄러움과 수치이자 삶 속의 고통이라고 생각했다. 행복이란 무엇이며 이성이란 무엇인지, 덕과 정의와 연민의 정이란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게 되는 경멸의 시간은 온전하지 않은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을 가지게 되는 시간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 길은 끊임없는 낮아지는 몰락과 내리막의 길일 것이다. 그럼에도 니체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눈을 깜박이는 이가 아닌, 파멸하고 멸망할지라도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 위를 기꺼이 걸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이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한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질문하며 기꺼이 내리막길을 걷는 이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한다. 위버멘쉬를 향해 걷는 길은 끊임없이 고통스러운 파멸이면서도 동시에 그 자체로 고상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우리가 고통스럽고도 고상한 밧줄 위의 길을 꿋꿋이 걸어나가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투스트라가, 우리가 내리막길을 걸어 다다르게 될 위버멘쉬는 어떤 곳일까?

고독한 자여, 너는 사랑하는 자의 길을 가고 있다. 너는 너 자신을 사랑하며, 그 때문에 너 자신을 경멸한다. 사랑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경멸을.

- 106쪽

“제자들이여, 이제 나 홀로 길을 가련다! …
나 진정 너희에게 권하노니, 나를 떠나라. 그리고 이 차라투스트라에 맞서 너희 자신을 지켜라! 더 바람직한 일은 그의 존재를 수치로 여기는 일이다! 그가 너희를 속였을지도 모를 일이니. …
너희에게 명하노니, 이제 나를 버리고 너희 자신을 찾도록 하라. 너희가 모두 나를 부인하고 나서야 나 다시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 ”

- 129~130쪽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에게 고독 속에 머물기를, 자신을 떠나 우리 자신을 찾기를 눈물로 간청하고, 진정으로 권한다.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온전한 나로서 존재하라.’라는 뜻으로 다가왔다. 그는 고독 속에서 자신을 사랑하고 경멸하며, 자신을 지키고 자신을 찾기를 바랐다. 즉 끝없는 파멸과 내리막길 끝에 다다르게 되는 위버멘쉬란 인간을 뛰어넘는 어떠한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닌, ‘온전한 나’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니체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온전한 내가 되고자 하는 욕구를 인정하며, 우리가 이것을 실현해나가는 존재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아, 형제들이여, 내가 지어낸 이 신은 신이 모두 그리하듯이 사람이 만들어낸 작품이자 광기였다!

- 47쪽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위버멘쉬가 등장하기를 우리는 바란다.”

- 131쪽

사람들을 향해 눈물로, 진정으로 이야기하는 차라투스트라의 모습은 벅찬 감동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니체를 ‘신은 죽었다.’라는 문장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니체가 신의 존재를 부정했다고 여기곤 했다. 그런데 니체가 이야기한 ‘신의 죽음’이란 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 아닌, 우리의 마음 속에서 죽어진 신을 의미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니체는 대지에 충실하지 않고, 진심으로 궁금해하지 않으며, ‘자기’는 없어진 채, 자유롭게 춤추는 신을 품지 못하는 이들의 마음 속에서 죽어진 신을 보았던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사람을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나를 나답지 못하게 만드는 허상을 품고 그것을 신이라고 믿는 이들이 너무나도 아팠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대지에 충실하기를, 신체로 살기를, 파멸의 길을 걸어 결국 ‘온전한 나’가 되기를 말하고 또 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온전한 나’라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어떻게 위버멘쉬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

“너희가 모두 나를 부인하고 나서야 나 다시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진정, 나는 지금과는 다른 눈으로 내가 잃은 자들을 찾아 나설 것이다. 형제들이여, 그러고 나서 지금과는 다른 사랑으로 너희를 사랑할 것이다.”

- 130쪽

다음주에는 다시 홀로 걷기 시작한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를 통해, 온전한 나란 무엇인지, 위버멘쉬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 우린 어떻게 해야하는지 고민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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