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모리슨

이제 그만 과거의 아픔을 잊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폴 디는, 세서가 노예사냥꾼을 맞닥뜨렸을 때 딸을 죽였던 것에 대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인간이라면, 자식을 죽이는 것이 아닌 다른 선택을 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잘못했어, 세서.”
“거기로 돌아가야 했다는 거야? 내 아이들을 데리고 거기로 돌아가야 했다고?”
“방법이 있었겠지. 뭔가 다른 방법이.”
“무슨 방법?”
“세서, 당신은 두 발 달린 인간이야. 네 발 달린 짐승이 아니라고. 그가 말했다.

- 273쪽

과연 폴 디의 이야기처럼 그 순간 세서에겐 다른 방법이 있었을까? 세서가 인간답지 못한 선택을 했던 것일까?

과거의 삶과 관련된 언급치고 상처가 아닌 게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모든 것은 고통 혹은 상실이었다.

- 102쪽

학교 선생은 줄자로 내 머리 둘레를 재고, 코 너비를 재고, 엉덩이 둘레를 쟀어. 내 이에 번호를 매겼지.

- 315쪽

“아니, 아니야.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야. 그 여자의 인간적인 특징은 왼쪽에, 동물적인 특징은 오른쪽에 적으라고 했잖니. 줄을 맞추는 걸 잊지 마라.” 나는 뒷걸음질치기 시작했어. 고개를 돌려 길을 보지도 않았지. … 머리가 미칠 듯이 가려웠어. 마치 누군가 가느다란 바늘로 내 머릿가죽을 콕콕 찌르는 듯했어.

- 318쪽

흑인 노예로의 삶은 인간임을 박탈당하는 삶이었고, 세서의 삶은 ‘아프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정도의 아픔을 가진 삶이 아니었다. 세서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그녀에게 주어진 삶이었으며, 세서의 상처는 주어진 삶으로부터의 상처였다. 그저 삶을 살아가는 것과 다르게 세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내야만’ 했다.

그렇기에 세서는 폴 디가 이야기하는 ‘다른 방법’을,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평범한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세서는 인간이기에, 인간답기 위해, 자식들 또한 인간으로 살아있을 때 생을 마감하도록 하는 선택만이 가능했던 것이다.

“내가 그를 막았어.” 세서는 한때 울타리가 있던 자리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내 새끼들을 보냈다고, 안전한 곳으로.”

- 271쪽

난 절대 널 떼어놓고 싶지 않았다는 걸 너도 알잖아. 절대. 하지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었어.

- 315쪽

세서에게 주어진 삶은 그 자체로 상처가 되는 것이었고, 이러한 삶을 ‘살아내는’ 것이 인간다움을 지켜내는 길이었다. 세서는 주어진 삶 속에서 잊을 수 없는 아픔을 기억하며 인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 처절하게 살아냈다.

“지금은 밀물의 시대에서 썰물의 시대로 가고 있어요. 이 시대가 좋든 싫든, 한국인은 지금 대단히 자유롭고 풍요하게 살고 있지요. 만조라고 할까요.”

- 이어령 마지막 인터뷰,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中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미래를 생각하기보단 현재를 즐기라는 의미의 ‘YOLO(You Only Live Once)’라는 단어가 유행하고, 베스트 셀러 목록엔 늘 행복이란 감정을 응원하는 듯한 제목의 책들이 자리한다. 현 사회는 청년들에게 꿈을 꾸기를 바라는 사회라기 보다는, 단지 아픔이 없이 ‘잘’ 살기만을 바라는 사회인 듯하다. 현재 우리 청년들의 삶이 ‘살아내야하는’ 모습인가를 고민했을 때, 우린 안정적인 사회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모습에 가깝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것이 인간다움을 지켜나가는 길이었던 세서와는 달리, 우리는 그저 살아있는 것만으로 인간다움이 지켜지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까?

"나는 이것이 출몰하는 우리의 과거, 그리고 그녀의 과거가 되길 바랐습니다. 과거, 유령처럼 불쑥불쑥 찾아오는 과거 말이죠. 기억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는 법입니다. 그것과 정면으로 부딪쳐 돌파해나가기 전까지는."

- 464쪽 (토니 모리슨의 <뉴욕 타임즈> 인터뷰 中)

"덮어놓고 살지 마세요. 그리스 사람들은 진실의 반대가 허위가 아니라 망각이라고 했어요. 요즘 거짓말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잊어서 그래요. 자기가 한 일을 망각의 포장으로 덮으니 어리석어요. 부디 덮어놓고 살지 마세요.”

- 이어령 마지막 인터뷰,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中

「미래대예측」을 통해 지음이 생각한 인간의 전제조건은 인간은 이기적이지 않아야 하며, 희망을 향해 나아가야 하고, 스스로에 대해 고민하고 답을 찾아나가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빗대어 생각해 볼 때 과거를 묻어두지 않고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아픔을 잊지 않아야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세서가 가졌던 아픔처럼 우리의 사회 속에 혹은 누군가의 삶 속에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처절하게 살아내야만 하는 아픔에 대해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지음은 자신의 삶에 존재하는 아픔을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무언가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해나가는 인간다움을 추구하며 살 수 있는 길의 시작임을 이야기했다. 이것은 스스로 인간이기 위해 해내야만 하는 노력인 것이다.

“잊을 수 없는, 잊지 않아야 하는 아픔이 있으려면 내 아픔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나의 삶의 아픔에 민감해야할 것 같아. 무엇이 아픈지 잘 알아야 하니까.”
“마음 속엔 수 많은 방이 있는데, 크고 작은 아픔들에게 방 하나하나를 온전히 내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해. 모든 방을 매일 열어보진 않겠지만, 이것들이 마음 속 한 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 삶의 태도가 변화될 수 있는 거지.”

- 지음의 대화 中

결국 빌러비드는 나의 아픔이자, 모두의 아픔이었다. 지음은 현재에 존재하는 아픔을 숨기고 묻어두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 자신의 아픔의 모양과 이유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아픔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하며, 처절한 누군가의 삶을 잊지 않아야 한다. 현재의 아픔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것 또한 이처럼 인간이고자하는 마음과 노력일 것이다.

이것은 전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124번지 뒤로 흐르는 시내 근처에는 그녀의 발자국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 발자국은 아주 친숙하다. 아이든 어른이든 발을 대어보면, 꼭 맞을 것이다. 발을 빼면, 마치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것처럼 발자국은 다시 사라진다.


곧 모든 흔적이 사라지고, 발자국뿐 아니라 물과 그 물 아래 있는 것 전부가 잊힌다. 남는 건 날씨뿐이다. 기억하고 지워지고 행방이 묘연한 이들의 숨결이 아니라 처마를 스치는 바람, 혹은 너무 빨리 녹는 봄의 얼음이다. 그저 날씨뿐. 물론 키스를 바라는 아우성도 없다.


빌러비드.

- 448쪽

다음주 지음은 토니 모리슨의 또다른 작품인 「하느님 이 아이를 도우소서」를 읽으며, 아픔과 위로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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